핸드크림
사람들이 많이 모인 회식자리였다. 나는 친하지 않은 스터디 사람들과 (이번 기수 최초의 회식이라는 명분밖에 없는) 회식자리에 끼게 되었다. 집에 일이 있어서요.라는 한마디면 되었는데,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그 눈에 거짓을 말하기 힘들었다. 나는 네이버 지도앱으로 우리 집까지 가는 길을 검색하면서 언제 일어나면 될지 대충 간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앞에 그 사람이 앉았다.
순간 은은하고 담백하니 좋은 냄새가 훅 끼쳐왔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고 그 사람을 살폈다. 나처럼 이 자리를 빨리 뜨고 싶어 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우리 테이블은 대충 그런 기류의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나는 그 사람에게 뜬금없이. 혹시 향수 뭐 쓰세요?라고 물어보았고 저는 향수 안 뿌리는데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 대화는 이내 끝내고 나는 속으로 머쓱하단 생각을 했다. 더욱이 이 자리를 뜨고 싶었다.
갑자기 눈앞에 손등이 보였다. 저는 핸드크림만 발랐는데 혹시 이 냄새인가 봐요. 했다. 나는 그의 손에 얼굴을 가까이했다. 아. 이 냄새 맞네요. 향이 좋아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잠시간의 정적이 이어졌다.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저는 먼저 일어나 봐야 할 것 같아요. 즐겁게 노세요. 하고 나가려는데 그 사람이 따라 나왔다. 저도 집이 멀어서요. 이제 일어나야 해요.
우리는 비 오는 거리를 같이 걸었다. 어디로 가세요. 대충 그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가 동일한 방향의 지하철을 타게 될 거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속으로 탄식했다. 아아… 다른 방향으로 말할걸. 그 사람이 내릴 지하철 역에 다다라 우리는 끝내 어색하게 잘 가시란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그다음에도, 또 다음에도. 그렇게 주에 2번. 3개월. 스터디가 끝나면 그 사람과 같은 방향의 지하철을 기다렸고, 함께 탔고 그 사람은 먼저 내렸다. 우리는 굳이 같이 집에 가자라는 말이 없어도 자연스럽게 함께 걷고 있었다. 나는 그 점이 좋았다. 부담스럽지 않았고, 무엇보다 함께 걷고 있으면 은은하게 풍겨오는 그 냄새가 좋았다. 어느 날은 진지하게 혹시 몸에도 그 핸드크림을 바르는 거냐, 바디로션 타입도 있는 거냐고 물어보기도 했는데 그 사람은 크게 웃기만 했다.
스터디는 입김 센 사람들이 싸우게 되며 흐지부지하게 끝을 맞았다. 스터디를 하지 않으니 그 사람을 만날 일도 없었다. 흠, 번호라도 물어볼걸. 몇 개월이나 집에 같이 가는 사이였는데 휴대폰 번호도 모른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집에 가는 길엔 저 집이 맛집이라느니, 벌써 꽃이 피었다느니 그런 이야기만 해대서 그에 대해 아는 것도 없었다. 아쉬울 사이도 아닌데 아쉬웠다. 나만 이런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사람은 어떻게 지내려나 - 그런 생각도 서서히 안 하게 될 즈음. 종로의 한 카페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익숙하고 반가운 냄새가 났다. 고개를 훽 올려 주위를 두리번거렸는데 시야에 그 사람이 들어왔다. 나는 속으로 너무 반가워서 다가가서 인사를 해야 하나. 사적으로 밥 한번 먹지도 않은 사람인데 너무 반가워하면 오버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 사람이 나를 발견하고 놀란 눈으로 내 앞으로 왔다.
오랜만이네요.
정말 오랜만이에요.
나는 무슨 AI로봇처럼 대답했다. 앉아도 되나요? 일행이 있는 것 같은데 여기 앉으셔도 돼요? 괜찮아요. 그럼 앉으세요. 마지막으로 본지 꽤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그 사람은 여전했다. 여전히 말끔하고 좋은 냄새가 나는 사람. 취업 준비는 잘 되어가세요? 그럭저럭요. 쉽지 않네요. 저는 지난달부터 출근하고 있어요. 작은 회사에 취직했어요. 아, 그러시구나. 축하드려요. 뭘요. 그런 얘기를 몇 분 더 나누다가 그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했다. 저 이제 가봐야 할 거 같아요. 아, 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 사람을 서울 한복판에 카페에서 만난 게 운명처럼 느껴졌지만 그 와중에도 번호를 물어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약간 망설이다 가방에서 핸드크림을 하나 꺼내더니 카페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이 향을 좋아하시는 거 같아서 하나 드리려고 했거든요. 스터디가 갑자기 파하게 되어서 언제 또 어떻게 드려야 하나 고민했어요. 가방에 넣고 다니길 잘했네요. 어머나, 저는 드릴 수 있는 게 없는데. 그는 가볍게 웃더니 괜찮다고 하고 돌아섰다.
잠깐 엮일뻔한 사이었지만 이대로 마무리되어 더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마음에 품은 미스터리 인물 하나쯤은 있어도 좋지 뭐. 그가 선물한 핸드크림은 아주 아주 아껴 썼다. 야금야금. 나도 좋은 향기를 풍기고 어떤 인상을 남기고,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