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미안
결혼을 하겠다.라고 말하니 엄마는 말했다. 결혼은 좀 늦게 해라. 순간 내 마음에 푸쉬식…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결혼하겠다’라는 나의 선언은 내 마음에 확신이라는 마침표를 찍기 위한 것이기도 했고, 잘한 결정이야 또는 축복해라는 말과 함께 독립적인 나의 삶을 인정을 받고 싶은 것이기도 했다. 엄마의 ‘결혼은 좀 늦게 하라’는 소리가 내 마음에 작은 소용돌이를 일으켜 나는 그 소용돌이를 잠재우려 애써야 했다. (평생 엄마 말을 잘 따르는 편은 아니었지만) 자녀의 입장으로서 부모가 결혼을 만류하는 것이 정말로 마음이 불편했다. 매번 이 화두가 대화 속으로 던져질 때마다 ‘엄마 왜 그래?’라는 말로 대화가 종료되었다. 나는 진정으로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다.
몇 번의 화냄과 설득을 거쳤다. “엄마는 엄마의 인생이 있고, 나에게는 내 삶이 있어. 내 삶의 주체인 내가 결정한 대로 할 거야”(쓰고 나니 무슨 뮤지컬 대사 같다.) 나는 결국 말해버리고야 말았다. 엄마는 한숨을 푹 쉬며 나와의 대화를 더 이상 이어갈 수 없다는 듯 전화를 끊었다. ‘그만’이라는 카톡 메시지가 뒤이어 전해졌다. 그렇게 자갈돌의 심정이 며칠간 이어지다가 다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견례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전화 통화 속에서도 엄마는 짐짓 불편한 기색을 끼치며 그것을 이렇게 빨리 해야 하냐는 태도였다. 뒤엉킬 대로 뒤엉킨 마음이었지만 우선은 상견례를 잘 마치고 싶었으므로 내 할 말만 툭 던지고 도망치듯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상견계 3주 전쯤이었던가. 엄마가 집에서 웬 옷 사진을 찍어 보내왔다. (나는 3년 전 본가에서 독립했다.) 옷걸이에 걸린 붉은색 셔츠, 스카프, 그리고 평소 엄마가 절대 입을 일 없는 정장바지.
“이 옷 어때? 이쁘나”
엄마는 상견례에 입고 갈 옷을 고민했었던 거다. 주변의 조언을 얻어 어떤 옷이 좋을지, 어떤 머리를 하고 가면 될지. 본인의 치아가 많이 상했는데 상대편 가족에게 못나 보이지는 않을지 걱정했던 것이다. 순간 마음이 와르르 무너졌다. 나는 그만 울어버리고 말았다. 엄마 미안. 미안. 미안. 진짜 미안해.
딸의 결혼 선언에 쓸쓸한 마음을 감출 데가 없었던 엄마를 이해하지 못한 게 미안했고, 못되고 이기적인 말로 당신 가슴에 생채기를 낸 딸에게 맞춰주기 위한 엄마의 노력이 그제야 보인 게 미안했다.
항상 한 발 앞서서 마중 나가있는 엄마의 마음이, 한참을 지각한 나를 또. 보듬었다.
엄마는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다고 했다. 영어를 잘하고 싶고 대학도 가고 싶었다고 했다.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세상에 있는 이것저것의 냄새를 맡아보고 직접 만져보고 싶었다고 했다. 나는 엄마가 아낀 돈으로 피아노를 배우고, 엄마 돈으로 해외에서 영어를 배웠으며, 엄마의 적금으로 대학을 나와 엄마의 것보다 훨씬 괜찮은 인생과 가치관을 쌓았다. 그러면서 나는 열심히 엄마의 세상과 멀어졌다. 엄마는 무엇을 바라고 나를 가르쳤을까. 100원, 200원을 아껴가며 부어온 적금들을 오직 나를 위해서 깨뜨릴 때 기대했던 미래는 뭐였을까. / 안 느끼한 산문집. 강이슬
나는 때때로 엄마의 절절한 사랑이 부담스러웠고 나를 의지하는 게 싫어 일부러 거리를 두려고도 했고, 때로는 미련한 사랑에 마음이 쓰리기도 했다. 엄마의 30대와 40대, 50대에 모두 내가 있다. 엄마의 젊음을 나에게 쏟아부으며 무엇을 바랐을까. 갓난아기 때부터 씻기고 입히고 먹이며 콩알(?)만 하던 그것이 이제는 다 커서 품을 떠나려 할 때, 엄마가 충분히 쓸쓸하고 헛헛할 수 있음을 미처 몰랐나, 아니 모른 척했나. 그저 내 마음만 중요해서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내 마음을 마주 보니 내가 무척 미워졌다.
얼마 전에 본가에 다녀왔다. 엄마를 꼬옥 안고선 미안한 마음을 고백했다. 엄마는 말했다. 원래 딸자식은 엄마한테 다 그런 거야. 그러니 아까운 눈물 흘리지 말라.라고 하면서 붉어진 눈가를 비비며 말했다. 나도 엄마 어깨에 눈을 포옥 대며 눈물을 감췄다.
아마 나는 이 마음을, 이 일을 금방 잊고 엄마에게 또 되바라진 소리를 할지 모른다. 그래도 그때는 조금 더 빨리 엄마의 얼굴을 마주 보고, 쓸쓸했을 엄마의 등을 안아주고, 쓸어줄 수 있기를. 한평생 자신의 젊음을 갈아 넣어 ‘ㅇㅇ이 엄마’로 살아온 그녀를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