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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이지영 Jan 30. 2021

늘 23번이던 아이

2019년 4월의 일기. 녹나무


  1번 김상태, 2번 김준범, 3번 김재형, 4번 강수철, 5번 좌시훈, 6번 이진혁... ... 23번 이지영.

그때 당시에도 학교 운동장에 잔디가 깔려 있었고 한라산 풍경이 멋졌다.


  초등학교 동창들이 각각 몇 번이었는지를 다 기억한다.  말도 안 된다고 하겠지? 하지만 내 어릴 적 친구들은 서로 모두를 기억한다. 가나다 순도 아닌 생일 순이었다. 그래서 덩달아 모든 반 친구의 생일몇 월인지 까지 기억다.


  작은 학교에 다녔다. 유치원 때부터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친구들이 바뀌지 않았다. 한 반 밖에 없는 학교였기 때문에 학년이 바뀌어도 변하는 건 담임선생님뿐이었다.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친구들과 고민을 나눈 적이 있다. 그 주된 내용은 ‘어떻게 하면 새로운 친구를 사귈 수 있을까?'이다. 


  고등학교를 가게 되면 지금의 친구들이 뿔뿔이 흩어질 텐데, 그리고 새롭고 낯선 친구들을 만나게 될 텐데 그 시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법조차 몰랐던 것이다. 10년 동안 같은 반이었던 아이들은 서로의 시작을 기억하지 못한 채 친구가 되어있는 것이다.


  나에게는 1살 차이 오빠가 있다. 친구들은 먼저 졸업한 오빠에게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친구에게 처음 건넨 말이 무엇이었는지를 물어봐 달라 했다. 오빠는 나에게 “지우개 있어? 지우개 좀 빌려 줘.”라고 알려줬다. 나는 진지하게 친구들에게 전달했고, 그 말을 들은 친구들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입학 첫날에는 지우개를 챙기지 말아야겠다고 이야기 나누던 게 생각난다. 지금 생각해보니 참 순수하다.


  그때 그 친구들 중 지금 이 마을을 지키는 건 나 혼자뿐이다. 하지만 다들 돌아오고 싶어 한다. 실제로 돌아올 수 있는 마을로 만들고 싶어 나는 오늘도 숲 해설을 한다.



  꽃의 계절이다. 이 시기에 제주에서는 줄지어 가는 대형버스 행렬을 쉽게 볼 수 있다. 수학여행 단체 팀들이다. 덕분에 숲 또한 벅적거린다. 10개 반 정도의 학교들이 한꺼번에 움직이다 보니 몇 차례에 걸쳐 나눠서 오더라도 한번 방문에 백 명이 훌쩍 넘는다. 방문한 아이들에게 제주 숲의 매력을 전달해주고자 최선을 다해 해설을 하긴 하지만, 우르르 몰려왔다 가는 단체 팀의 해설을 끝내고 나면 겨우 해치웠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러던 중 특별한 팀을 만났다. 수학여행 단체라고 하는데 놀랍게도 고작 24명이 다였다. 그것도 한 학년이 아닌 1, 2, 3학년 전교생이 함께 왔다고 한다. 그 사실을 듣자마자 열과 성을 다해서 숲 해설을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청도 아주 작은 시골마을에서 왔다는 그 중학생 친구들의 표정에는 해맑음이 있었다. 눈동자에 호기심이 어려 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 같다. 이 작은 손님들과의 만남에 중학교 시절의 내 모습이 함떠올랐다.
 


  대체적으로 도시에서 사는 분들일수록 더욱 숲 안내를 듣길 원하고 그만큼 더 많은 것을 얻어 가신다. 오히려 제주 지역 어르신들과 농촌지역에서 오신 할머니, 할아버지 팀들은 숲해설을 잘 듣지 않으신다. 한참 해설하고 있으면 빨리 가자고 재촉하거나 듣기도 전에 다 알고 있으니 안내할 필요 없다고 지나치신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 작은 학교 아이들은 도시에서 자란 아이들보다 더욱 열심히 들어주었다. 심지어 숲 해설이 끝난 후에는 아이들로부터 함께 그 사이에 껴서 단체 사진 찍기를 요청받았다. “농촌에서도 멋진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서 감사해요.” 한 아이가 집으로 돌아가며 나에게 건넨 한 마디가 아직까지도 마음에 맴돈다.

숲에서 만난 생명 – 붉은 새순이 올라오는 녹나무


  숲의 계절을 생각했을 때 봄에는 보통 연두 빛 새싹, 가을이면 붉은 단풍을 떠올리는데 이 나무는 조금 다르다. 봄에 어린잎이 올라오는데 붉은빛의 새순이라 멀리서 보면 단풍이 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겨울에도 잎이 지지 않는 상록성의 나무이다. 진초록 잎은 그야말로 가죽처럼 질기고 광이 나서 다른 나뭇잎과 견주었을 때 한층 건강해 보인다. 나뭇잎을 살짝 잘라서 코를 대 보면 그 특유의 나무 향이 깊게 올라온다.


  몇 년 전에 글씨나 그림을 나무에 새기는 서각을 한창 배웠었다. 1년 넘게 말린 녹나무였는데도 칼로 몇 조각 파내니 꼭 살아있는 듯이 진한 향을 풍겨서 깜짝 놀랐다. 녹나무를 가지고 좁은 방에서 조각을 하다 보면 그 향에 취해 어지럽기까지 했기에 유독 기억에 남는다.  

나는 칼과 망치를 다루는 여자였다.


  곶자왈 안에서도 종종 보이지만 내가 사는 동네 한경면 저지리의 가로수로 녹나무가 심겨 있기에 더욱 친숙하다. 지금은 심은 지 몇 년 되지 않아 초록 길을 만드는 것에 만족하지만, 성장이 빠르고 거목으로 자라는 나무인 줄 알기에 나중에는 숲 터널을 만들어 멋진 풍광이 연출되지 않을까 기대가 되기도 한다.


  사실 커다란 나무들이 양 옆에 줄지어 있으면 도로를 넓히기 힘들다고 불평하는 이들이 있다. 뉴스마다 미세먼지가 극성이다. 마스크를 쓰고 밖을 돌아다니는 모습이 불과 몇 년 사이에 이상하지 않은 풍경이 되어버렸다.


  빠르고 편리한 넓은 도로보다는 쾌적하고 푸르른 아름다운 길이 미래의 우리들에게는 더욱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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