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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이지영 Jan 29. 2021

어르신에게 받은 꼬깃한 만원 한 장

2017년  4월 일기. 봄 단풍나무


숲에서 만난 사람들 : 어르신을 만나다.


  나에게는 11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져 ‘오른쪽을 전혀 쓸 수 없던’ 아버지가 계시다. 감사하게도 과거형이다. 내가 서울에서 제주도 곶자왈 숲으로 돌아온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는 아버지 덕분이라 하지만 그 당시에는 때문이라는 표현이 적절했다.


  아버지께서는 47살이란 이른 나이에 왼쪽 뇌혈관이 막혀 오른쪽이 마비가 되셨고, 28년간 다니던 직장을 하루아침에 그만둘 수밖에 없으셨다. 좌절한 아버지는 3년 가까이 사람 만나기를 꺼렸다.

47살의 아버지. 재활치료시 다섯개의 주판알도 넘기지 못해 분했단다.


  지금 나의 직장이 된 ‘환상숲 곶자왈공원’은 그때 당시에 아버지께서 사람이 만나기 싫어 들어간 도피처였다. 당신 걸을 길이나 내야지 싶어 버려졌던 가시덤불 숲을 온전한 왼손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길을 내기 시작한 것이 지금의 산책로가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과정에서 손의 감각이 돌아오고, 어눌했던 입도 풀리더니만 몸이 회복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곶자왈 숲은 나에게는 아버지를 살려 준 고마운 숲이기도 하다.


50살의 아버지, 넘어지고 깨지며 걸을 수 있게되다.


  숲의 좋은 공기와 나무들의 피톤치드 성분은 아버지에게 좋은 회복제가 되었다. 길을 내는 과정에서 땀을 흘리는 생활과 돌을 나르는 행동이 작업치료도 되었을 것이다.

56살의 아버지, 10년전보다 더 젊어지지 않았는가.

   하지만 무엇보다도 아버지를 버티게 해 준 것은 나무들의 생명력이 아니었을까. 흙이 없는 이 척박한 돌땅에서도 나무들은 살아가고 있었다. 당신께서는 돌을 뚫고도 살아가고, 잘리고 잘려도 또 일어나는 그 억척스러운 생명력을 보며 나 또한 살아야겠다 생각했단다.

  “죽을 수도 있었던 아버지를 버티게 해 준 고마운 숲입니다. 자율 산책을 하실 때 아버지를 감탄케 했던 억척스러운 나무들의 생명력을 선생님들께서도 느끼며, 아픈 마음을 위로받고, 새롭게 살아갈 힘을 얻어가는 시간 되세요.”



  어르신들이 많이 섞여 있던 팀이어서 그런지 어제 해설의 마무리는 아버지의 말로 끝을 맺게 되었다. 숲 안내를 마치고 손님들께 인사를 하는데 걸음이 더디면서도 맨 앞에서 열심히 듣던 나이 지긋하신 할아버지께서 눈물을 글썽이며 다가오셨다.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힌 만원을 꺼내 내 손에 쥐어 주며 말씀하셨다.



  “그런 사연이 있는 숲이라니, 참 감동적이었네. 이 돈으로 자네 아버지 산소에 소주 한잔이라도 사서 올려주게.”



 이야기를 잘 못 이해하신 것 같다며 손사래를 칠까 하다 뒤에 가족처럼 보이는 일행들의 찡긋 눈짓을 읽고는 ‘아이고 어르신 감사합니다’하고 그 돈을 받아 들었다.


  우리 아버지는 너무나 건강하게 바로 저기 보이는 데서 일하고 계시다. 나 또한 완쾌되어 건강해지셨다고 분명히 전달을 했는데 그 어르신은 나의 이야기를 헷갈려할 만큼 나이가 들어계셨던 것이다.


  그 어르신은 나의 이야기 속에서 당신의 아버지를 생각했으리라. 함께 한 가족들은 그런 약해진 아버지를 바라보며 따뜻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내가 오히려 뭉클해지는 순간이었다.


숲에서 만난 생명 – 풍나무 꽃을 본 적 있나요?


  야마오 산세이의 ‘더 바랄 게 없는 삶’이란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누구에게나 사건이라 이름 붙여도 좋을 만한 한 그루의 나무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나무가 아닐 수도 있다. 풀일 수도 있고, 어느 날의 저녁 해일 수도 있고 어느 강일 수도 있다.



 풍경이란 사건이다. 참 멋진 표현이다. 그저 바라보게 되는 풍경이 그냥 그 자리에 있는 멈추어진 상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 안에서 펼쳐지는 사건이기도 하다니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흥미롭게 느껴진다.


  나에게 단풍은 사건이다. 단풍이라 하면 모두가 빨간색과 가을을 떠올린다. 하지만 나는 연두색과 봄이 먼저 떠오르게 되었다.


  사계절 푸르른 상록수가 빡빡한 곶자왈 숲만 바라보노라면 겨울에서 봄이 넘어가는 순간을 도통 느낄 수 없는데 단풍나무가 야들야들한 잎을 움트는 순간 봄도 함께 피어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조그맣게 오므린 채 작은 바람에도 흐느적거리는 모양새는 도톰하고 뻣뻣한 진한 초록 잎들 사이에서 눈에 띌 수밖에 없다. 분홍으로 흐드러지게 꽃을 피우는 벚나무라도 함께 있으면 봄 단풍 따위는 거들떠도 안 볼 텐데 이곳 곶자왈에서는 오늘도 단풍만이 단연 돋보인다.


  다른 키 큰 나무들이 잎을 움트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햇빛을 받기 위해 아래서부터 부지런히 손을 펴기 시작한다. 이래서 봄은 아래서부터 시작되고 겨울은 위에서부터 찾아온다고 하나보다.


  오늘은 숲을 걷다 보니 단풍나무의 꽃들도 보인다. 단풍나무 꽃은 워낙 작아서 눈여겨보지 않으면 알아채지 못한다. 방문하는 이들에게 단풍나무 꽃을 본 적 있냐 물으면 열에 아홉은 단풍나무에도 꽃이 피냐며 의아해한다.

  나 또한 단풍의 연둣빛을 사랑하게 된 후에야 꽃을 알아채기 시작했으니 매일 보는 풍경 안에서도 관심의 유무에 따라 보이는 범위도 달라진다는 게 사실인 것 같다. 나의 글을 통해 당신도 단풍나무의 꽃을 눈여겨보게 되었으면 한다. 아니, 단풍나무의 꽃이 아니어도 좋다. 당신만의 사건을 하나 찾아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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