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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tlionheart Jun 02. 2023

<파리에서 마지막 밤에>


1. 혼자만의 여행

작년 가을 어느 날인가 이대로 버티다가는 내가 터져버릴 것만 같은 날이 있었다. 그간의 험난한 여정에 대한 보상으로 유럽여행을 신속하게 결제하고 나니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면서, 여행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남은 한 해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올해 2월에 로마, 피렌체, 베니스를 거쳐 파리에 가는 여정을 불야불야 짜면서, 혼자 가는 자유여행에 대한 불안감이 불쑥불쑥 올라오곤 했다.


이태리의 기억은 좁고 어두운 골목의 홈리스, 집시 소매치기 무리, 여자 혼자라고 뒤따라 오던 각기 다른 날의 낯선 남성들, 은근한 듯하면서도 대놓고 하는 인종차별이었다.

어디 여행 가서 한국음식 안 찾는 나인데, 혼자 여행한 지 팔일쯤 되니 사무치는 외로움으로 매운 한식을 강하게 갈망하게 되었다.


파리로 넘어갔을 때 조카가 운영하는 한인민박에 도착하자마자 커다란 컵라면 한 사발을 들이켰다. 한국말과 한국사람들이 그리웠는데, 이게 해소가 되니 신생아 통잠 자듯이 한 번도 안 깨고 잘 수가 있었다.


거의 매일 열리는 와인파티에서 20, 30대 친구들도 사귀고.. 연식이 오래된 나와 놀아줘서 젊은 친구들이 고마웠다.



2. 젊었을 때는 그게 젊음인지 몰랐었다.


조카는 파리에 디자인 공부를 하러 가서 졸업하고 눌러앉은 케이스다. 결혼할 여자친구도 소개시켜줬다. 미술사를 공부하러 학교에 다시 들어간 늦깎이 학생이라고 했다. 삼초뒤에 나는 갑자기 눈물이 터져버렸다. 당황한 조카가 휴지를 건네며 “왜 그러시냐고?” 묻자,  눈물을 꾹꾹 누르면서 “나 젊었을 때가 생각나서 그런다고.”라고 답했다.

공부에 유난히 열정이 많았던 나의 20대가 순간적으로 떠오르면서, 그때의 내 모습이 조카의 여자친구와 오버랩되어버린 것이다.


파리에서 2주간의 여행을 마무리하면서, 마지막날 오랑쥬리 미술관에서 산 클로드 모네의 <수련> 카드에 조카에게 보내는 글을 썼다. 나에게 고모, 고모 하니 용돈도 줘야 할 것 같아서 100유로도 동봉했다.


우식이에게

첫날 일층 현관에 마중 나온 너를 보니 오빠 얼굴에 수염만 붙여놓은 것 같아서 웃음이 저절로 나오더라.

젊었을 때는 그게 젊음인 줄 몰랐던 것 같아.

꽃같이 예쁜 혜림이 많이 아껴주고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길 바란다.

얼마 안 되지만 둘이 맛난 거 사 먹어라.



3. 이상은의 <언젠가는>

며칠 전에 이상은이 부른 오래된 노래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구글링으로 검색해 보니 제목은 <언젠가는>이었다.

내 가슴을 아리게 만드는 구절이 있어 여기 적어 본다.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하지만 이제 뒤돌아보니

우린 젊고 서로 사랑을 했구나


눈물 같은 시간의 강 위에

떠내려 가는 건 한 다발의 추억

그렇게 이제 뒤돌아 보니

젊음도 사랑도 아주 소중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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