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딸아이의 아르바이트
수시 전형에서 다 떨어진 딸아이는 작년 한 해 동안 아르바이트를 두 탕씩 뛰면서 힘들게 번 돈을 만수르 딸처럼 호사스럽게 써버렸다.
처음에 시작한 알바는 단지 내 유명한 우동가게에서 서빙을 하는 것이었다. 일하는 횟수를 점차 늘리더니 일주일에 5-6일을 나가게 되었다.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일할 때 한번 가게에 가보겠다고 했더니, 절대 가게에 오지 말라고 했다. 벼르고 벼르다가 어느 일요일 오후에 먼발치에서 딸아이 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우동면과 국물, 김가루 등의 꾸미를 재빠르게 포장하고, 포스를 풍기면서 좁은 가게 안을 분주히 누비고 있었다. 집에서는 나무늘보처럼 침대와 한 몸이 되어 밥 먹을 때와 게임할 때만 식탁과 거실을 오가는 분인데, 딸의 또 다른 페르소나를 보니 대견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짠하기도 했다.
알바 횟수가 늘어 수입이 늘게 되니 요즘 덕질 중인 뮤지컬 배우를 보려고 티겟팅에 신나게 돈을 쓰기 시작했다. 배우 공연장을 따라다니며 한 번만 봐도 될 거를 서너 차례 이상 보는, 내가 보기에는 기이한 행동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시급이 좀 높은, 그러니까 더 힘든 일이라고 생각되는 양고기집 알바를 구했다고 통보를 했다. 그렇잖아도 몸도 약한데 왜 이렇게 돈 욕심을 내냐고 야단을 치니, 자기가 여행도 다니고, 호캉스도 하고, 뮤지컬 덕질도 해야 하는데 엄마가 다 대줄 거냐고. 묻는데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
울며 겨자 먹기로 그래. 그 대신 건강관리에 신경 쓰면서 하라고 당부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머리가 좋았는지 양고기집 서빙을 시작한 지 얼마 안돼서 사장님이 시급도 올려주고 , 일하는 날을 늘려달라고 했다고 하면서, 일주일에 우동집과 양고기집 두 군데를 뛰는 날이 삼사일이 되었다. 이런 생활을 사오 개월 하더니, 힘이 많이 부쳤는지 갑자기 우동집을 정리하고 양고기집에 집중을 해야겠다고 했다.
가게 마감 시간이 10시라서 정리하고 집에 오면 11시가 다 되었다.
그러다가 작년 가을부터 직원들, 아르바이트생들 술자리가 부쩍 많아지면서, 귀가시간이 새벽 두 시 이럴 때가 잦아졌다. 당연히 나는 불안한 마음에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아이가 집에 들어올 때까지 편하게 잘 수가 없었다.
올해가 들어선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딸아이가 엄마. 나 남친 생겼어. 사귄 지 한 달 됐고. 양고기집 직원이고. 나보다 다섯 살 많아. 얘가 지금 그동안의 나의 뇌피셜을 인증하고 있다.
잦은 늦은 귀가가 이어졌을 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나 보다. 고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나에게는 아직 애기인데, 남자 친구라니.. 그것도 다섯 살이 많다니.
그래. 대학은 나왔니? 물어보니, 휴학생이라고 입은 말하고 있지만 딸의 표정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내가 너 20년을 키웠어! 속은 부글부글 했지만 꾹 참으면서, 나는 남친에 대한 정보를 하나라도 더 캐내려고 부드럽게 질문을 이어갔으나 더 이상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풋풋한 스무 살이 또래를 만나야지 무슨 아저씨를 만나고 있나. 대학도 중퇴한 것 같은데, 왜 어린 아르바이트생을 꼬여냈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일면식도 없는 딸의 남자 친구가 미웠다.
2. 내 딸이 사진 속에서 웃고 있다.
사춘기가 초등학교 사 학년 때부터 시작된 딸아이는 그 이후로 자기 사진을 못 찍게 했다. 어쩌다가 예쁜 꽃과 나무가 있는 곳에 가게 되면, 만 원짜리를 줘 가면서 사진 한 장 겨우 찍을 수 있었다. 어렵게 찍은 사진을 보면, 한참 아팠던 삼사 년은 우울함 그 자체였다. 그 이후에 건강을 회복한 다음에는 사진 속 표정은 시니컬 그 자체였다. 카톡 프사도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절대 자기 사진을 안 올리는 아이였다.
주중, 주말 가리지 않고 열심히 알바를 하던 어느 날이었다. 늦가을인가 경복궁 야간개장 하니까 거기 구경 간다고 주말에 쪼르르 나가버렸다. 밤에는 아르바이트하랴, 낮에는 자고, 주말에는 데이트하러 나가버리니 요즘 딸 얼굴 보기가 힘들다.
카톡 단톡방에서만 가족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이날 열두 시 가까이 돼서 들어온 아이는 침대에 쓰러져 정신없이 잠을 잤다.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딸의 아이폰 화면이 갑자기 켜지면서, 커다란 사진이 떴다.
까만 밤에 연못 건너편에서 환한 빛을 내고 있는 경회루를 배경으로 딸아이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있었다. 폭이 제법 넓은 새빨강 한복 치마는 조각조각난 핏빛 쉬폰으로 덮여 있었는데, 치마 앞섶의 쉬폰을 살짝 들어 올리고 있었다. 검정 저고리는 금빛인지 은빛인지 알 수 없는 실로 소매단을 따라 화려한 자수가 놓여 있었다.
딸아이는 살짝 부끄러워하는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는데, 입술은 웃을 듯 말 듯 한일자 모양이었지만 결국에는 웃어버렸겠구나.라는 미소를 띠고 있었고, 커다랗게 뜬 눈은 촉촉하게 빛나고 있었다.
좋긴 좋은가 보네.. 너의 이런 표정은 내 평생에 처음 본다..
야! 너 원래 내 소속이거든!!! 갑자기 나도 모르게 질투심이 폭발한다.
다 마음에 안 드는데, 시크한 내 딸 웃는 사진을 작품으로 찍어주니 그거 하나는 마음에 드네.
남자친구와의 데이트가 부쩍 잦아지던 어느 날 딸아이의 카톡 프사가 바뀌었다. Vivian Maier 사진전에 둘이 갔었는지 벽에 걸린 작가의 사진들을 배경으로 피사체가 되어 서 있는 딸아이의 측면 흑백 사진이었다.
나는 갑자기 가슴이 떨렸다. 그리고 잠시 멍해졌다.
내 작품을 작품 사진으로 찍어 놓았더라..
그냥 느낄 수 있었다. 이 사람이 딸아이를 많이 좋아하고 있구나.라는 걸.
그 사진을 본 이후 나는 마음이 많이 누그려졌다.
그리고 그 사진을 한 장만 달라고 했더니, 언제나 그렇듯이 딸아이는 만원을 달라고 했다.
나는 누가 딸인지 엄마인지 모르게 징징거리다가 결국에 만원에 산 흑백사진을 찡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그래. 이런 게 만원의 행복인거지. 이렇게 되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