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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tlionheart Dec 07. 2023

<나의 전직>

Unsplash에서 퍼온 사진


나의 전직은 연구원이었다. 전공은 생명과학 분야다.


내가 고등학생인 시기에 티비 아니 테레비에서는 유독 생명과학 분야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자주 방송되면서, 미래는 생명공학의  시대가 될 거라고들 단정적으로 미디어에서 떠들어댔었다.


그런 다큐멘터리를 보고 꽂힌 이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나였다.


하얀색 가운을 입고 실험실에서 실험을 하는 내 모습을 그려보면 그렇게 멋있어 보이고, 설레일 수가 없었다.


학력고사에서 국어를 대차게 망친 나는 무조건 합격할 수 있는 학교로 하향지원을 하게 되어, 천상계(SKY)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그래도 원하던 과에 들어가 석사까지 마치고 연구원으로 취업을 할 수가 있었다.

대학원 생활도 위경련과 위염을 달고 살 정도로 만만치 않았지만, 연구소 생활은 상상을 초월했다.


등록금을 내고 실험을 한다는 것과 월급을 받으면서 실험을 한다는 것은 천지차이였다.  데이터가 안 나오면 여기저기서 압박이 들어와서 야근은 당근이고, 밤을 새우면서 실험을 해야 하고, 박사들끼리는 대놓고 파워게임 하고, 같이 일하게 된 박사 중에 쓰레기가 걸리면 데이터 조작에 대한 압박까지 가해져 도덕성까지 시험에 들게 되기도 했었다.


회식 문화는 또 어땠나. 나는 술도 잘 못 마시는데, 술을 강권하고. 요즘 같으면 성추행으로 구속됐을 사람들이 꽤 있었다. 아직도 연락을 주고받고 있는, 같은 연구소 다녔던 친한 전직 연구원들을 만나면 꼭 나오는 말이 있다. 공공의 적이었던 A 박사와 회식문화.


우리는 구글링으로 A 박사가 지금 어디서 일하고 있는지 알아내기도 하고, 들리는 소문에 어디서 무슨 사고를 쳤다더라, 그 사람이 그때 나한테 데이터 조작하라고 했다, 와 너한테도 그랬냐?... 끝없는 안주거리가 나오곤 했다.


지금은 어디 가서 경단녀라고 말하기도 뭐 할 정도로 전공과는 멀어져 기억이 아득할 뿐이지만, 한 때 내 젊음을 불살랐던 그때는 참 힘들고 암울했던 기억이 더 난다.


어른들의 ‘남의 돈 벌기가 쉽지 않다’는 말은 그때나 지금이나 영원한 진리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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