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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tlionheart Dec 23. 2023

이기적인 엄마

Unsplash 사진


1. 어제의 엄마

엄마를 모시고 대학병원 뇌신경과에 다녀오라는 아빠의 부탁에 어제 새벽부터 운전을 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엄마는 인지기능 저하를 늦추는 약을 오래전부터 복용을 하고 있었지만, 작년에 부모님이 분가를 하고 나서는 급격하게 상태가 나빠져, 눈빛에 초점이 없어지고, 우리를 알아보지 못했었다. 그래서 아빠가 경찰서에 엄마의 지문을 등록해 놓기까지 하셨다.


극적으로 상태가 좋아진 것은 내 기억이 맞다면, 아빠가 대마씨 종자유를 구해서 엄마에게 일정 기간 복용하도록 하면서다. 눈의 초점이 돌아오면서 원래의 고집불통 성격도 함께 돌아오게 되었다.


어제 진료실에서 증상을 얘기해 보라는 깡통 로봇처럼 차갑고 기계적으로 보이는 의사의 질문에, 엄마는 십여 년 전의 스텐트 시술을 못 받았던 몸 상태부터 시작해서 위가 나빠 소화가 안된다는 다양한 증상들을 쏟아 내었다.

나는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기에 당황조차 하지 않았으나, 외모도 깡통 로봇 같이 생긴 의사는 진심 화가 나서 "여기는 신경외과다. 기억력을 보는 곳이고, 다른 거는 나는 모른다."라고 했다. 엄마는 누구에게 기세로 지는 사람이 아닌데 웬일인지 말을 멈췄다. 다행이었다. 서둘러 진료실을 나와 결제를 하고 처방전을 받고, 엄마를 부모님 집으로 모셔다 드렸다.



2. 기억 속의 엄마


2-1. 아픈 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함께 살면서 엄마가 얼마나 나에게 못되게 했었는지 생각이 났다.

어렸을 때부터 기가 약한 나를 엄마는 본인의 뜻대로 쥐락펴락 하기 위해 상처 주는 말을 서슴없이 해왔다. 같이 살 때는 설거지 좀 해달라거나 반찬 한 가지라도 좀 만들어 달라거나 하면, 네가 나를 하녀로 부려먹으려고 합가를 하자고 했구나. 하면서 소리소리를 지르고, 아빠가 집 살 때 해준 돈을 내놓으라고 하면서 그 돈을 주면 분가를 하겠다고 협박을 했었다. 물론 이런 말을 할 때는 다른 가족들이 없을 때만 하였다.


엄마를 용서할 수 없게 만든 일은 따로 있었다.


증상도 없던 딸아이가 중 1 때 갑작스럽게 췌장암 진단을 받게 되었고, 수술받는 날까지의 일주일 사이에 종괴가 너무 커져버렸다. 이 질병에 우리나라 최고 명의인 주치의가 수술 못하고 나올 수도 있다고 말하면서 수술방으로 들어갔다. 그때의 공포심은 말로도 글로도 표현할 수가 없다.

병실에서 남편과 둘이 말 그대로 피 토하는 울음을 쏟아내며 짐승처럼 목 놓아 울었다. 열몇 시간의 수술 뒤에 나온 주치의는 췌장과 비장을 전절제 하고, 위, 간, 소장 등의 소화기관을 삼분의 일 이상씩 절제했다고 했다.


이후로 아이는 당뇨환자가 되어 인슐린 펌프와 연속 혈당 측정기를 몸에 달고 살게 되었고, 식사 후에는 보험도 안 되는 약을 한 움큼씩 평생 먹어야 했다.

이후 3년간 심한 복통과 편두통, 부정맥 등의 증상으로 응급실과 병원 검사, 진료가 일상이 되었었다. 이 시기에 친구에게 보낸 자살을 하고 싶다는 카톡을 발견하고서, 정신과 상담과 심리상담을 받기도 했지만, 우울증 약과 불면증 약을 아직도 먹고 있다.



2-2. 고마운 사람들

이 시기에 나는 딸아이 친구 엄마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밤새 응급실에 다녀온 날이면 반찬이나 국을 해서 현관문에 걸어놔주기도 하고, 땅만 보는 나를 불러내어 산책을 시켜주기도 했었다. 안면만 있고 친분도 없었던 어떤 엄마는 단지 내에서 우연히 나를 마주치자, 와락 나를 껴안고 수십초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는데, 그 순간에 참 위로를 많이 받았었다.



2-3. 이기적인 엄마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들이 이랬는데, 우리 엄마는 그 시기에 어떠했는가를 떠올리면 인연을 끊고 싶을 정도였다. 그 와중에도 나는 다섯 식구의 살림을 혼자서 해나가야 해서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 지쳐 있었다.


어느 날은 참다 참다 폭발해서 엄마에게 울면서 소리를 지르며, 나 너무 힘들다고. 나 좀 도와 달라고. 반찬 두세 가지만이라도 좀 해달라고. 미친년처럼 발악을 했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엄마는 여전히 오전 아홉 시에 집을 나가 저녁 여섯 시가 되면 집에 돌아왔다.

합창단 활동이며, 운동 스케줄, 점심 식사 약속, 나들이 약속 등으로 바쁘게 돌아다녔다.


나를 그 지옥에서 구해 준 것은 다름 아닌 가사 도우미 파견업체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가사 도우미가 와서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해 주고, 이불 빨래까지 다 돌려주는 그날은 내 몸과 마음이 진정으로 휴식할 수 있는 날이 되었다. 그 덕분에 마음의 여유도 조금은 찾을 수 있게 되면서, 상황을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살 수 있어서 감사하고, 약으로라도 삶이 유지가 되니 감사하고, 주변 엄마들이나 학교 선생님들이 다들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니 감사했다.


단 한 사람 용서가 안 되는 사람이 있으니 그게 내 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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