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otlionheart Feb 24. 2024

3년 묵은 곳 청소하기


문을 닫아 놓아서 남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나만 알고 있는 3년 이상 묵은 그곳이 있다. 바로 주방 싱크대 아래 <코너장>이다. 이곳은 아이가 사용하던 각종 베이킹 관련 “가루”들과 “틀“들이 방치되어 있는 곳이다.

치워야 된다는 생각조차 안 하고 살다가, 작년 연말에 옷을 정리하고 난 다음부터 어지러운 코너장이 자꾸 생각나기 시작했다. 올해 들어서는 ‘곧 치워야지’, '애랑 같이 치워야지', '봄이 오기 전에 치워야지' 이러고 있었다.

스마트폰 스케줄 표를 보니 일주일만 지나면 개학인 것이다. 거기다가 뉴욕 사는 언니가 3월 첫 주에 들어와서 나는 틈틈이 수행비서 노릇을 해줘야 한다. 오늘 아니면 반년을 또 저 상태로 지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드니 속이 답답해졌다. 또, 아이와 같이 정리하겠다고 기다리다가는 하세월이 될 듯했다.



아이가 집에서 디져트를 안 만들기  시작한 것은 대략 고등학교 중반쯤이었던 것 같다. 학교에서 실습을 하기 시작하니까 집에서까지 하고 싶은 생각이 안 든다고 했었다. 재작년에는 알바 하고 돈 버느라 바빴고. 작년부터는 대학교에 진학해서 본격적으로 하루종일 서서 실습을 하니, 질리기까지 한 것 같았다.



먼저 아이에게 버려야 하는 것들만 알려달라고 했다. 아이는 베이킹 재료만 다 버리고, 틀만 남겨달라고 했다. 박력분 포대부터 베이킹용 초콜릿 파우더, 굳은 황설탕이 든 큰 유리병, 팬케이크 가루.. 온갖 가루들이 계속 나왔다. 쓰다 남은 올리브유 병도 나오고. 가루들만 따로 오십 리터 비닐에 모으니 비닐의 반이 넘어간다. 가루가 날려 기침을 켁켁 하면서, 딸에게 마스크 좀 갖다 달라고 구원 요청을 했다.

내 기침 소리가 심상치 않았는지 아이가 신속하게 마스크를 갖다 주고 부엌에서 퇴장해 버린다. 이 난리통에 절대 동참하고 싶지는 않은가 보다.

뚱뚱해진 비닐봉지를 옮기려고 들었는데, 비닐이 너무 얇았는지 한 곳이 뜯어지면서 밀가루가 세기 시작한다. 급하게 또 딸을 불러 부엌 정리장 속에서 같은 오십 리터 비닐봉지 두 개를 펼쳐서 달라고 했다. 봉지를 한 겹 덧씌우는 과정에서 아까 터진 곳과 다른 반대편이 또 터져서 내 앞치마는 밀가루 범벅이 된다. 겨우 두 번째 비닐봉지까지 덧씌워서 더 이상의 참사는 막을 수 있었다.


물로 헹궈야 하는 물품들은 가볍게 흐르는 물에 씻어주고, 주방 세제가 필요한 것들은 수세미로 닦아서 싱크대에 일단 쌓아놨다. 마를 때까지 기다릴까 하다가 빨리 정리를 하고 싶어서 마른행주로 물기를 다 닦아줬다.

억센 초록색 수세미에 주방 세제와 베이킹 소다를 묻혀서 코너장 바닥의 묵은 때를 벅벅 문질렀다. 젖은 행주로 선반의 비눗물을 몇 차례 닦아주니 본래의 하얀색 선반으로 돌아왔다.

베이킹 용도별로 틀과 도구를 정리하는 것으로 숙원 사업을 마칠 수 있었다.

재활용 봉투에 담긴 버리는 물품들을 베란다로 옮기고, 무거운 밀가루 봉지는 두꺼운 종이봉투 안에 넣어뒀다. 가족 단톡방에 인증샷을 올리면서, 파란색으로 밀가루 봉지를 표시해서 남편에게 집에 오면 버려달라고 해놨다.


깨끗해진 코너장



손을 씻고, 전기포트에 물을 끓여 드립백 커피를 내렸다.

내 방으로 들어와 조용히 커피를 한 모금씩 마시고 있다.

3년 묵은 코너장을 청소하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청소해야지’라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게 해 주었던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여러 가지가 머리에 떠오르지만, 그중에 가장 큰 힘을 발휘했던 건 ‘며칠 전의 다음 포털 노출’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예쁘고 아련한 아이와 나의 추억인데, 그 도구들이 엉망으로 몇 년간 방치되고 있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제일 불편하게 만들었다.

정리된 코너장 사진을 보면서 작은 챕터 하나가 클로징 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청소 뒤에 느끼게 되는 산뜻한 기분에 더해서 ‘앞으로는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작은 희망’의 기운이 느껴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녀의 뒤태를 보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