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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tlionheart Apr 03. 2024

술 마신 다음날 아침에


어젯밤에 소맥을 말아 마셨다. 맥주도 여름철에만 다섯 번 먹을까 말까 하는데 웬 소맥인가 하면.. 요즘 회사일로 스트레스 많이 받는 남편이 밤 아홉 시에 매운 곱도리탕을 시키면서 '카쓰'와 '처음처럼'을 시켰다. 술을 시켰기에 배달기사가 남편의 신분증 검사를 했다. 딱 봐도 흰머리 가득한 중년인데 배달기사는 자기 일에 충실했다.


옆에서 술친구는 못되더라도 분위기라도 맞춰줄까 해서 소주:맥주=1:2로 말아봤다. 유튜브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맛있는 소맥 비율'이었다. 곱도리탕을 한 스푼 떠먹자 정수리가 찌릿하더니 두피 땀구멍에서 땀이 쫙 쏟아져서 머리카락이 다 젖었다. 와~ 술안주는 원래 이리 매운 것인가 하면서도 숟가락이 자꾸만 갔다. 옆에서 남편이 말을 꺼내길 기다렸지만 남편은 넷플릭스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오른손으로는 소맥과 안주를 번갈아가며 먹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어느덧 소맥 한잔을 다 비우게 되었다. '그래.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가 보다. 혼자 속으로 삭이고 싶은가 보다.' 하면서도 나는 내심 서운했다. 술도 못 마시는 내가 무려 '소맥'을 말았는데.. 혼자 삐져서 나는 내 방으로 들어와 문을 꽉 닫고서 어느새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술이 깨면서 일어나 보니 아직 자정이 안되었고 식탁은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정신이 너무 또렷해서 당황스러울 정도였지만 나에게는 매일 밤 수면을 도와주는 약이 있기에 얼른 약을 찾아 먹었다. 그리고는 한두 번 깨긴 했지만 오랜만에 잠을 푹 잘 수 있었다.

늦어버린 기상 시간.. 여섯 시 반이었다. 머신 전원부터 켜서 부랴부랴 아이스 카페라떼를 만들고 남편을 깨웠다.


"OO야, 언제 일어나야 돼?"

"지금"


일어나자마자 매일 아침 복용하는 약들을 각자 한 줌씩 들고서 남편은 식탁에서, 나는 주방에서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며 약을 먹었다. 중요한 아침 일과를 마치고 나자 남편은 늦게 일어난 만큼 그 중요한 '아침밥'을 건너뛰고 샤워를 하러 욕실로 들어갔다.

흰머리 가득한 구영탄 머리 모양에 잠을 깨려고 눈을 껌벅이는 남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장의 무게가 그대로 느껴졌다.

매일 새벽 다섯 시에 아침밥을 먹고 나가는 남편의 뒤통수에 '이제 밥 좀 그만 좀 챙겨 먹어라' 하고 싶은 날들도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그 새벽밥과 모닝 라떼 덕분에 우리 관계가 완전히 깨지지 않고서 여기까지 올 수 있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돈 많이 안 벌어와도 되니 아프지 말고 남은 인생 살아보자’라고 전해주고 싶은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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