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다섯 시에 마시는 아이스 오트밀 카페라떼는 카페인의 순수한 목적에 충실한 음료다. 나이가 드니 유당분해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져서 내 평생의 동반자인 whole milk로 만든 카페라떼도 위장이 부담스러워져, 무한생성되는 가스 폭탄을 터뜨리다가 언젠가는 낭패를 볼 것 같아 귀리우유로 바꾼 지 삼 개월이 되었다. 다행히 위장관은 살렸으나 내 혀의 palate은 밍밍함을 아직도 어색해한다.
우울할 때나 불안할 때나 앞이 보이지 않을 때나 커핑을 하라는 전무후무한 명언을 보고서 동굴 틈을 비집고 나왔다.
마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병들었을 때에도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서로 사랑하라는 주례사처럼, 변동성이 큰 삶에 변하지 않는 상수를 던져준 느낌이 든다. 그런데 그 상수는 플러스를 증폭시키거나 마이너스를 증폭시키는 게 아닌, 파동을 평온한 일상으로 수렴시키는 제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어느새 말이다.
자신이 Giver인지도 모르는데 giver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그 세상의 빛과 소금. 어쩌고 하는 클리셰(cliche)를 완성시키면서, 어른 동화나라가 지금 여기 어딘가에도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갖게 만든다.
갑자기 누군가 "지금 마이너스인데 제로가 돼야지."라는 푸념 섞인 하소연을 했을 때, "제로를 지나 플러스가 되잖아요"라고 답해준 게 나였다는 게 떠올랐다.
음. 그래.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허우적거리는 사람 보면 지푸라기라도 던져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