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겁고 후끈했던 여름을 뒤로하고 어느새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기온을 즐기고 있다. 벌써 사각거리는 오리털 이불을 꺼내 덮으면서도 서늘함을 동시에 느끼고 싶어서 내 방 창문을 한 뼘 정도는 열어 놓고 잠을 청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거실로 나왔을 때는 추위를 느끼고 싶어서 거실 창문과 뒷베란다로 나가는 문도 열어 놓는다. 이게 무슨 심리인가 하는 의문이 들지만 아마도 이번 여름에 너무 더위에 시달려서 그런 것 같다.
시어서커(지지미) 원단의 여름 이불과 여름 원피스 잠옷들은 세탁해서 각각 장롱과 서랍에 넣어 두었다. 봄에 언니와 함께 무지에서 샀던 크림색 도톰한 원단의 파자마와 좀 더 얇은 네이비 파자마를 꺼내서 번갈아 입고 있다.
파자마의 감촉이 부드럽고 내 체온을 따뜻하게 만들어준다. 창문을 열고 스탠드 불빛 아래 앉아 서늘함과 따뜻함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
'이런 게 가을 느낌이지!'
여전히 새벽에는 두 번, 심하면 세 번씩 잠에서 깨고 있다. 약을 몇 번 바꿨어도 두 시간에 한 번씩은 꼭 그 시간에 잠을 깨니 불면증은 불치병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잠드는 시간이 문제인가 싶어서 열 시에도 자보고, 열한 시, 열두 시 또는 새벽 한 시에도 잠을 자봤지만, 정확하게 잠든 지 두 시간 후에는 잠에서 깨어난다. 다시 잠들기까지는 불편한 몸과 기분을 풀어보려고 거실과 방을 배회하며 소파에 앉았다가 침대에 누웠다가를 반복한다.
한여름에도 늘 그래왔듯이 이런 루틴 아닌 루틴을 반복했었다. 여름에 깨어났을 때는 '덥다'는 느낌만 들어서 에어컨을 켜기 바빴다.
그런데 시월이 되어 이 새벽 루틴을 반복하면서 내방 소파에 앉아 있으니 가슴 한가운데에 서서히 구멍이 나고 있다는 걸 눈치채게 되었다. 처음엔 아주 작은 구멍이었는데,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구멍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리로 조금 낮은 온도의 느리고 작은 바람이 들어오기도 하고 나가기도 하고 있다. 아직은 가슴이 뻥 뚫려버리진 않았지만, 앞으로 기온이 더 떨어지고 바람이 세차게 불기 시작하면 가슴 구멍이 점점 더 커질 것이란 걸 알고 있다.
그때가 되면 나는 가을을 심하게 타게 될 것이다. 그럴 때면 사람의 온기가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고, 또 사람으로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도 느끼게 될 것이란 것도 알고 있다.
매년 강하고 약한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알고 있어도 대비할 수 없는 그 감정은 단순하게 '기온 하강에 따른 심리적인 변화'라고 표현하기에는 아쉽다. 영어 표현으로는 'sentimental'이라고 쓴다는데 이것도 뭔가 부족하다.
좀 더 섬세하고 모두에게 와닿는 완벽한 표현이 있다면 그것은 다음의 문장일 것이다.
'가을을 타다'
나는 가을을 탄다. 약간 아픈 사람처럼..
그래서 속이 쓰리기도 하지만 내 내면으로 시선이 돌려지고 집중하게 된다.
처절하게 가을을 나게 되지만 나는 그런 내 모습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