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으로 백수가 된 지 한 달이 조금 넘었다. 앞으로도 쭉 백수 생활을 할 확률이 높다는 생각에 무력감이 들었다. 헬스장도 일주일에 겨우 한두 번 밖에 못 가고 있다. 일단 신발을 신고 집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힘들다. 그렇다고 집안일을 부지런히 하는 것도 아니다. 삼십 년 가까이 해 온 살림살이가 그저 지긋지긋할 뿐이다. 어쩌다가 시간이 맞는 친구들이나 주변 언니들한테 전화해서 수다를 떨거나 급만남으로 영화를 보고 차 마시는 게 소소한 즐거움이다. 전체적으로 의욕이 없다는 게 문제다.
'근로자의 날'인 오늘은 학원이 휴무가 아니라고 들었는데, 자고 일어나니 까맣게 잊어버렸다. 여유를 부리며 드립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새벽부터 놀러 나간 남편한테 재미있게 치고 있냐고 카톡을 보냈더니 전화가 왔다. "오늘 애 학원 가는 날이잖아. 깨워야지." 헉! 그나마 아침에 밥이라도 해놨으니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애 밥 굶길 뻔했다. 서둘러 냉장고에서 채소 볶음과 콩나물을 꺼내 간장 양념을 붓고, 배추김치를 꺼냈다. 딸아이를 급하게 깨워서 밥을 먹게 하고 씻으라고 하면서 차를 가지러 나갔다.
옆동에 이사를 오는지 사다리차와 이삿짐 트럭이 우리 동 앞 주차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차를 빼서 빙 반바퀴 돌아 동 뒤에 정차를 하고 비상등을 켰다.
후드득후드득 갑자기 빗방울이 앞창을 때린다. 어제 세차를 할까 말까 망설였는데 안 하길 잘했다.
딸아이가 내려와 차에 탔다. 휴무날이라 도로에 차가 별로 없어서 생각보다 빨리 학원에 도착했다. 딸아이를 내려주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하늘이 더 어두컴컴해지더니 비가 더 세차게 들이친다. '집에서 늘어져있기 참 좋은 날씨네'
우리 집 현관 앞에 올라왔더니 세탁소에 맡겼던 내 겨울옷이 한가득 문고리에 걸려있다. 낑낑대며 옷을 들고 들어와 소파 위에 쌓아놨다. 일단 이것부터 정리하고 맘 편히 쉬어야겠다 싶었다. 비닐을 "북" 찢고 세탁소 옷걸이를 하나씩 빼내서 집에서 쓰는 옷걸이로 바꿔주고 원래 옷이 걸려있던 자리에 걸어주었다.
일하러 학교에 다닐 때에는 약간의 온도 차이에도 안감이 있는 옷과 없는 옷, 섬유가 좀 도톰한 옷과 좀 얇은 옷 등등 필요한 옷이 항상 더 있다고 느꼈었다. 그런데 지금은 검정색 트레이닝복과 하늘색 스웻셔츠가 교복이 되었고, 약속이 있어 외출을 하는 날에는 셔츠에 청바지, 가디건을 입고 있다. 셔츠는 기온에 따라 두세 벌 돌려 입고 있다. 화장도 귀찮아져서 썬블럭을 바른 후 립글로스만 바르고 나간다. 나이 먹은 여자가 너무 후줄근해 볼일까 봐 그나마 귀걸이, 팔찌, 시계, 반지는 꼭 착용하고 나간다.
빗소리를 잘 들어볼까 해서 내 방 창문을 열었다. 우수관으로 빗물 내려가는 소리가 들린다. 이삿짐을 본격적으로 옮기는지 인부들 목소리와 사다리차의 기계음과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비가 오니 역시 운동은 못 가겠고, 'hotel lounge' 향이 난다는 인센스 하나 피워놓고, 식어버린 커피나 마시면서 본격적으로 늘어져 있어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