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막힌 타이밍
나의 고3 시절은 축구가 수능보다 중요했던 해다.
때는 바야흐로 2002년!
유상철, 황선홍, 안정환, 홍명보, 이천수, 차두리, 이영표, 박지성, 설기현, 김남일, 키야, 듣기만 해도 감격에 겨운 자랑스러운 그 이름들.
고3 수험생의 교실은 그야말로 축구가 지배가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해 6월은 어느 여름보다 뜨거웠으니까.
월드컵이 지나고 맞은 여름방학, 이제는 수능이 100일밖에 남지 않았다지.
그 여름에, 나는 큰집 어느 제사에서 방송국 카메라 감독인 사촌형부를 만났다.
- 방송국에 좋은 대학 안 나온 사람 없어. 피디 하고 싶다면서. 그럼 대학 따위 안 간다는 말 하면 안 돼. 일류대 출신이 허다한데, 방송국에.
이상했다.
난 방송이 꿈이지, 대학이 꿈이 아닌데.
도서관을 뒤져보니 형부 얘기가 다 맞는 것 같았다.
역시 세상은 이상해, 그런 곳이지.
그러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
공공도서관 한편에 깔끔하게 놓인 그 자태.
그 책이 나의 인생을 바꿨다. 역시 인생에는 그런 기막힌 타이밍이 있다. 나를 경제학도로 이끌어 주고, 나의 이십 대 사상을 지배한 유시민의 철학까지.
우연히, 아니 느닷없이 친구가 추천해 준 이 책, ‘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진리’도 타이밍이 기막혔다.
도대체 뭘 쓰고 싶은지,
뭘 하고 싶은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 이 순간에 내손에 왔다.
너무 많이 밑줄을 그어서 어느 부분이 가장 와닿았다고도 말 못 하겠다.
두 번 세 번 보고 싶은, 손이 자꾸 가는 그런 책.
보고 있으면 재미있고 궁금하고, 다시 봐도 새롭고 의미가 깊고 진한 그런 책.
극심한 경쟁사회에 놓여 있는 우리. 서로 이해하기 위한 답이 있다.
또한 문학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써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있다.
무엇을 읽어야 하는지, 거기서 뭘 보아야 하는지 답이 있다.
관용이 매우 넓은 책이다. 너그러움에 마음이 아주 편안해진다. 아, 그럴 수도 있구나 하는 여유가 생긴다.
다만, 융통성은 없다. 그때그때 달라지는 모습은 못 보았다.
나는 또 한 번 여전히 진보주의자이구나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