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운몽을 보았다.
서포 김만중의 ‘구운몽’을 완독한 사람은 많지 않을지언정, 교과 과정에 그 일부가 실려있으니 아마도 아주 모르는 사람은 없을 듯하다.
밀란쿤데라가 우리의 고전 소설 구운몽을 읽고 각색했다고 해도 나 같은 사람은 믿을 것 같은 책 ‘느림’.
‘팔선녀’ 대신 ‘공작부인’과 ‘쥘리’, ‘임마쿨라타’가, ‘양소유’ 대신 ‘뱅상’과 ‘베르크’가 등장한다.
쿤데라 자신도 서두와 말미를 장식하는데, ‘양진’인지 ‘양소유’인지는 잘 모르겠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는 결이 다른 이야기.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기억을 붙들고서 겨우겨우 소설의 중간쯤 도달해도, 도대체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하고 앞뒤로 책을 뒤적거리게 만드는, 독자에게 꽤나 불친절한 소설이다.
중간을 넘어서면 쾌락과 욕망에 관한 에피소드들이 등장하는데, 성적 판타지가 이보다 더 밋밋하고 메마르게 이어질 수가 없다.
어떤 장면은 내 몸이 아픈 느낌까지 든다.
내가 본 ‘느림’은 다른 사람들이 해석하듯 느리게 산다는 것과는 많이 다른 이야기였다.
느리게 사는 삶보다는 낯선 성 안에서 하룻밤 묵으면서 누구나 꿀법한 신비로운 꿈에 관한 이야기다.
평소 생각이 많고 공상을 좋아한다면 ‘느림’에 대해 긍정적이지 않을까.
무엇보다 추천할 점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비해 쿤데라를 만나기에 매우 가볍다. 고작 170쪽쯤 되려나.
불교와 관련 없는 구운몽을 한편 보았다. 그 정도의 가벼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