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속취사

평범한 한국인의 밥솥 사용법

by 코끼리 날개달기

- 내가 그 밥솥이 너무 갖고 싶어서 샀지. 갓 지은 밥이 쫀쫀한 게 진짜 맛있더라고.

글세, 남편이 밥솥이 너무 시끄럽다면서 깨.

밥솥이 막 말을 하잖아. ‘맛있는 밥이 곧 완성됩니다.’ 하면서.

나 밥할 때 자고 있는 거 꼴 보기 싫었는데 얼마나 꼬소하던지. 아하하하.

우리 남편은 한국말도 모르는데 큰 소리가 나니까 처음에 깜짝 놀라더라. 내가 그래서 또 일본 좀 무시해줬지. 일본에서 말하는 밥솥 봤냐면서.

처음에 일본 갔을 때는 공항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전부! 일본 회사 광고판만 보였어, 요새 가 봐. 전부! 한국 회사 광고야. 삼성, 엘지, 현대..



어렵게 한국에서 밥솥을 공수한 그녀는 이미 반해버렸다. 오랜 해외생활 끝에 한국 밥맛을 되찾게 된 것.

밥솥 하나 바꾼 것으로 그녀의 아침이 더없이 즐거워졌다. 이래서 여자들이 자꾸 그릇을 사 모으는구나.

일본인 남편과 결혼한 지 20년이 넘은 그녀다. 남편이 여태껏 배운 한국어라고는 인사 정도라고 한다. 그 시절 일본이 강대국인 것은 분명했으니, 그동안 한국을 무시하는 남편에게 쌓인 것이 많았을 터다. 고맙게도 최근에 바꾼 밥솥이 한국의 위상을 아낌없이 보여주고 있다.





나도 한 때 전기밥솥의 끝없는 기능을 쉬지 않고 시험했던 적이 있었다.

밥솥에 굽는 달걀 맛이란.

밥솥으로 찐 살살 녹는 부드러운 카스텔라.

따뜻한 식혜나 찐 약식도 당연히 맛있고.

전기밥솥을 이용하면 요리가 간편하고 맛도 좋았다.

밥을 식사시간에 맞춰 취사 예약을 할 수도 있고, 한국인 문화에 부합하는 '쾌속취사' 기능까지 탑재되어 있다.



- 엄마! 쾌속취사는 한국에만 있는 거 알아?

- 쾌속취사가 뭐지?



너무 오랜만에 쾌속취사라는 말을 들었더니 어색해서 그만 그게 뭐냐고 묻고 말았다. 주방 요리기구들을 스테인리스 재질로 바꾸면서 전기밥솥을 안 쓴 지 꽤 되었다.



- 아! 쾌속취사! 너 그 말을 어떻게 알아?

- 밥을 먹는 나라들은 많지만, 쾌속 기능 있는 밥솥은 한국 꺼 뿐이래. 친구들이랑 이야기하다가 인터넷에 찾아봤어.



그러고 보니, 전기밥솥으로 밥을 할 때는 '압력취사'를 눌러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밥은 꼭 '쾌속취사'로 했다.


지금은 전기코팅밥솥 대신 일반스텐밥솥을 사용한다. '마크 러팔로'의 영화 '다크워터스'를 보고 주방에 있는 코팅된 요리기구는 전부 치웠다. 전기밥솥이 아닌 밥솥들은 불을 조절하고 시간 맞춰 불을 꺼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하일라이터에 올려 둔 압력밥솥의 추가 돌기 시작할 때 불을 끄고 기다려야 한다.


이제는 '쾌속취사'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 어쩐지 내가 일상에 좀 느긋해진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던 찰나, 요즘도 스스로 '쾌속취사'를 하고 있는 거라는 생각에 실소가 터졌다.


불을 끄고 나서 1분도 지나지 않아 돌고 있는 추를 한숨으로 마주한다. 추가 멈출 때까지 10분 여를 채 못 기다리고, 긴 젓가락을 사용해서 쉭쉭 소리를 내며 힘차게 돌고 있는 추를 한쪽으로 휙 제쳐버린다. 맛있는 밥을 먹으려면 추가 다 돌아가 김이 천천히 빠지기를 기다려야 하지만, 그럴 생각도 하기 전에 이미 내 손은 젓가락을 집어 추를 젖혀버렸다. 기막힌 소음을 뿜으면서 뜨거운 김이 한꺼번에 확 새어 나온다.



이렇게 해도 어지간한 밥맛이 나오다니 역시 국산이 좋다. 한국밥솥에만 ‘쾌속취사’ 기능이 있는 게 사실이라면 그건 분명히 국산 제품의 뛰어난 기술력 때문일 것이다.


설마 성격 급한 한국사람들 못 기다릴까 봐 그런 기능 만들었을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