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잘 만났다

결혼기념일의 단상

by 코끼리 날개달기

아버지가 평범한 직장인이었다면,

엄마가 시골 풋내기이었다면,

나에게 언니나 오빠가 있었다면,

내 인생이 좀 달라졌을까.



우리 아버지는 내가 없는 자리에서도 내 이야기만 나오면 그저 좋아서 입이 귀에 걸렸다고, 사람들이 그랬다. 우리 엄마는 내 친구들이 자기 엄마였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엄마였다. 그런데 정작 나는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져서, 내 배경을 원망하며 살던 때였다. 왜 내 부모는 늘 싸우고 무엇을 하느라 계속 바쁘며, 어째서 나만 낳고 언니나 동생을 만들어 주지 않았는지, '탓'을 위한 '비난'이었다. 부모님의 선택은 부모로서 최선이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내가 부모가 되어 살아 보니, 부모님의 어떤 것도 잘못이라 말할 것은 아니었다. 두 분은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고, 그 이유는 오로지 ‘나’였다.



나는 운명을 믿지 않는다. 내가 노력하면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지금껏 살면서 했던 선택들의 결과로 내가 이 길에 있는 거라고. 그런데 고개를 들어보니 사방에 수많은 삶들이 자신의 선택이 아닌, 힘겹게 숙명을 받아들이며 사는 인생들이었다. 특히 가족이 그랬다. 부모는 내가 태어났을 때 이미 정해져 있기에 어쩔 도리가 없고, 자신의 아버지의 성을 따라 평생 산다. 부모에게서 받은 유전자와 부모에게서 받은 운명적인 환경에서 자란다. 어쩌면 그것이 '나'를 이미 결정짓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병도 없는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셨을 때, 처음 '운명'이란 것을 맞닥뜨렸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장례식을 치르고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유를 생각했다. 이유를 찾아야지 내가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생각 뒤에 남는 것은 수많은 후회뿐이었다. 엄마는 말했다.


- 아빠는 인생이 너무 힘들어서 돌아간 거야. 우리, 아빠가 저 먼 나라에 일하러 갔다고 생각하고 살자.


어른이 되어 보니 그 모든 것이 이해가 된다. 아직도 엄마와 나는 아빠가 먼 타국에서 일하고 있는 거라고 마음속으로 믿고 있다.



이제 몇 년만 지나면, 남편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의 나이가 된다. 며칠 전 결혼기념일이라고 케이크에 꽂은 초를 부는데, 남편의 머리 위로 흰머리카락들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남편이 저만큼 늙었으니 나도 이만큼 늙었겠거니 생각이 들었다. 이제 더 많이 보듬어 주고 이해해 주면서 살아야지 싶었다. 그래도 여전히 서운한 건 서운하다. 예전에는 남편에게 '결혼기념일'은 그저 평범한 다른 날과 같았다. 시부모님의 결혼기념일에는 식사도 같이 하고 축하해 드리면서, 정작 우리 결혼기념일에는 바쁘다고 그냥 넘기는 남편이 야속했다. 이제는 그런 과거도 이해해 주려고 한다. 남편도 노력하며 열심히 살았고, 지금은 나와 함께 케이크에 불을 끄고 온종일 아이들과 놀아주면서 함께 결혼 기념을 축하하고 있으니까. 언제 세상을 떠나게 될지 모르지만, 사는 날동안 좋은 기억들을 많이 만들고 싶다.



말로는 운명을 믿지 않는다고 했지만, 내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나는 운명을 믿었던 것처럼 보인다. 지금의 남편이 내 앞에 나타났을 때도 그랬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난 사람이라, 혹시 이 사람을 아빠가 하늘에서 보내준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믿었다. 결혼상대를 진지하게 고민하며 고르지 않았던 것은 내가 운명론자이었던 것인지도.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온전히 내 자유의지이기도 했다. 내 주위에 나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반대하는 결혼이었지만 결국 그 결혼을 했다. 운명을 믿었고, 그것을 선택했다. 결혼생활이 괴로울 때마다 이 만남을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후회했지만, 지나고 보니 모든 것은 내 선택이었고 그저 운명이라 믿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기댈 곳이 필요했다. 아버지라는 존재가 갑자기 연기처럼 사라지고, 그 빈자리를 채워줄 누군가를 애타게 찾았다. 남편은 옆에 있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게 가족이 되었다. 여전히 그는 나의 결핍을 채워주는 사람이다.



가족을 참 잘 만났다. 나의 가장 큰 자산이 가족이다.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마음속으로 기도할 때마다, 그 존재를 기억하고 의지한다. 환갑 넘은 엄마는 나와 가장 가까우면서 지혜로운 친구이다. 학교에서 있었던 매일 다른 이야기들을 조잘조잘 들려주는 아이들은 귀한 보물이다. 이만한 동반자도 없다, 내 남편. 나를 세상에 낳아 준 부모님께 감사하고, 나를 반려자로 선택한 남편도 고맙다. 그리고 나에게 자식으로 와 준 아이들도 감사하다. 나는 참 복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