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를 낼 정도는 아니다.
필리핀의 기나긴 봉쇄가 끝나고 다시 밖을 나갈 수 있게 되니, 처음에는 기분이 그렇게 오졌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자발적으로 집에 나를 가둬두고 있다.
전보다 빈번히 사람들을 만나서 그런지 귀와 마음이 이토록 예민할 수가 없다.
그리고 마음을 다잡고 나가서 사람을 만나면, 어김없이 또 기분 나쁜 경험을 반복해서 마주하게 되고.
아무리 궁리해도 당장 기분을 전환할 수 없을 때, 초등학생 아들이 상담사로 제격이다.
- 엄마가 요즘 좀 이상해. 누구를 만나고 오면 별 것도 아닌 일에 그렇게 기분이 나쁘다?
- 예를 들면?
역시 예시를 묻는 바람직한 상담사의 자세.
- 엊그제 Xavi 생일 파티에 갔었잖아. 근데 초대받은 다른 한국인 엄마가 그 생일 파티가 너무 별로라면서 흉을 보는 거야.
- 응.
- 아무리 거기서 한국말은 우리 둘만 안다지만, 싸구려 햄버거를 줬다느니, 생일인데 너무 준비를 안 했다느니.
- 와. 정말 너무하네.
- 그치? 아니, 영화관 빌려서 영화 보여 주고 햄버거에 인형이랑 컵케이크까지 선물로 준비했던데 어떻게 그런 반응일 수가 있지?
- 초대해준 걸로 고마워해야지 너무하네.
- 그치, 그치? 엄마가 이상한 거 아니지? 그런 소리 들으면 너무 기분이 나빠.
- 그럴 수밖에 없어. 엄마가 그 사람보다 한 수 위라 그래.
- 엄마가 한 수 위여서 그렇다고?
- 그 사람들은 뭘 몰라서 그러는 거야. 모르는 사람들은 어쩔 수가 없어.
- 그럼 기분 나쁜 건 어떻게 해결해야 돼?
- 그건 어쩔 수 없어. 학교 선생님들이 애들 가르칠 때, 아우 걔네들, 얼마나 답답하겠어. 근데 그게 기분 나쁠 일은 아니잖아?
- 기분 나쁠 일도 아닌데 내가 화가 나네.
- 응, 엄마 성격이 그래. 근데 이 오일 파스타 좀 싱거운데?
소금을 갖다 주는 동안 어느새 내 마음속의 화도 좀 풀렸다.
그래, 내가 그런 것을 잘 못 받아들이는 성격이다.
그래, 내가 그런 성격이다.
앞뒤 꽉 막혀서 옳고 그른 것을 가려야 하고 '반드시'를 입에 달고 사는 그런 성격이다.
세상에 꼭 옳고 그른 게 어디 있다고,
정해진 상식이라는 게 어디 있다고,
깨달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나는 멀었다.
아들이 나보다 한 수 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