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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나를 걸르고 길러낸다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쯤이나 가서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의
버려진 너와집이나 얻어 들겠네, 거기서
한 마장 다시 화전에 그슬린 말재를 넘어
눈 아래 골짜기에 들었다가 길을 잃겠네
-김명인 <너와집 한 채> 중에서
날마다 다니는 길을 벗어나 걸어본다
길은 익숙하게 길이 나서 익숙한 길 아닌 곳으로의 이동이 주저된다
길을 잃어본 적이 언제였던가
일상에 젖어 길을 나서지도 않더니 길을 만나지도 길과 헤어져보지도 못했구나
길과 하나 되어도 그것은 나의 온전한 바람이 아니었으니
길에서 떨어져 나와 ㄱ 모양의 길도 가보고 ㅣ 모양의 길도 가보고 ㄹ 모양의 길도 가보고 나서야 길의 조감도를 겨우 그려냈던 기억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길은 그 자체로 길한 형세를 지니고 있다
길을 찾았다고 길이길이 날뛰었던 추억이 새삼스러워
길을 그토록 딛고도 한 가닥 길을 가지고 집에 들어온 적은 없다
길 위를 아무리 걷고 또 걸어도 길이 대신 나를 다른 곳으로 옮겨준 적도 없다
길은 무심하게 사라지기도 하고 길은 다짜고짜 탄생하기도 한다
길이 없다고 말하지 마라
길은 한 번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적이 없다
길은 줄곧 나의 신발끈만 쳐다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