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철학자의 강연을 다녀와서
어느 철학자의 대중 강연을 보러 갔다.
그야말로 들으러가 간 것이 아닌 보러 간 것이다.
이미 그의 책은 모조리 읽어낸 상태이고 그가 지닌 사고의 결에 익숙한 지라 그냥 그의 자태를 바라보러 갔다.
예정된 2시간을 훌쩍 넘기는 이야기는 끝날 줄을 몰랐다.
강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스마트폰의 위태론은 이러하다.
매끄러운 이 기계는 우리로 하여금 대상에 대한 저항을 없애서 정보를 소비하는 '가축'으로 만든다.
타자가 가진 부정성과 저항을 스마트폰은 온통 순응과 수긍의 좋아요만을 양산하고 주고받음으로써 외면하게 한다.
상대가 없으니 세계가 사라지고 자아에만 천착해서 스스로를 우울로 몰아간다.
몸을 쓰지 않는 것에 대한 유감도 덧붙인다.
행동을 한다는 것은 손가락을 쓰는 것이 아닌 손을 쓰는 것이다.
그러니 손가락만으로 터치하는 스마트폰을 마주하는 것은 진정한 행위로 볼 수 없다.
행복은 손을 통해서 오고 만들어진다는 누군가의 말도 인용했는데 기억이 안 난다.
변화의 원인도 모르는 사이에 의식의 변화를 야기시키는 이 문명의 이기는 도구 너머의 괴물 같은 물건이 되었다.
한나 아렌트의 말도 가져와 했던 것도 같은데...
진실은 우리에게 멈춤을 준다고 했던가.
나는 들으러 간 것이 아니었기에, 진지하게 말씀 한마디도 놓치지 않아야 하는 수업이 아니었기에 본 것들에 대한 기억에만 의존해서 써 내려가고 있다.
조금은 시간이 지나서 기억 속에서 굴절을 일으킨 것도 있지만 대충의 골자는 이러한 내용이다.
너무 안 좋다고 하니 강연 내내 스마트폰을 만지작 거렸다.
손가락으로 하는 것은 손이 하는 것과 다르다고 하면 피아노는 스마트폰 다루는 수준에 멈춘단 말인가.
(그는 요즘 그랜드 피아노 연주에 빠져 있다고 고백하며, 피아노 치는 것은 손가락이 아닌 몸으로 치는 것이라고 해명을 하기는 했지만...)
그의 글은 좋아하지만 그의 말은 반발하고 싶거나 수긍이 안 되는 때가 왕왕 있다.
친절하지 않은 그의 태도도 한몫 하지만 가끔씩 근거 없는 논리의 개진도 불끈하게 만든다.
그래도 나의 인터넷 서점 신간 알림 서비스에 올라가 있는 몇 안 되는 작가 중의 하나다.
자주 감동하고 잘 놀라워하는 것은 대부분 영역의 대가들에게서 보이는 특징 중 하나다.
남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부분을 보는 혜안과 특별한 시선을 가지고 있음을 과시하는 몸짓일 수도 있다.
젊을수록 기존에 마련된 지식의 체계를 습득하고 이해하고 있음에 놀라워하다가 나이가 들어 갈수록 지극히 평범한 자연의 모습에 새삼 감동하고 자신의 분야에 맞닿는 언어와 감성을 얹어 표현한다.
지켜보는 이들은 생뚱맞기도 하고 저들은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고 믿어버리는 어설픈 실례를 하기도 한다.
그런 광경을 목격하더라도 너무 놀라거나 자신과 비교해 관대한 평가를 함부로 내리지 마라.
그들은 그저 사물의 뒷면을 애써 챙겨본 것뿐이며 자신의 시간을 멈추어 다루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을 뿐이다.
고독한 관찰의 결과다.
멈추니까 보였던 것이 아니라 제대로 보기 위해서 멈추는 수고를 한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