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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Apr 26. 2023

빈손인 날엔

0318

야심 차게 시작한 하루는 흐지부지 꼬리를 내린다.

아무런 성과나 보람도 없이 마무리된 기분이다.

도중에 끼어든 생각들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고

어영부영 시간을 보냈다.

일을 내려놓고 쉰 것이 아닌 일을 마음에 쥐고 쉬니 이건 쉰 것도 아니고 일한 것도 아닌 꼴이 된다.

생각이 여러 길을 나서니 길을 잃고 배회한다.

어떤 것도 사냥하지 못하고 포획에 실패했다.

사파리 Safari.

아프리카 언어로 무언가 얻어 돌아온다는 뜻이다.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용도보다 더 뜻이 우아하다.

오늘의 빈손 마감은 사파리하지 못한 모양새다.

과연 그럴까.

인간을 생산기계로 여기지 않는다면 성과의 차원과 의미의 스펙트럼을 조금 더 넓혀 이해해도 좋겠다.

쓸모없는 인간으로 24시간 존재했는지 가만히 짚어본다.

몇 가지 커뮤니케이션 개념을 습득하려고 애쓴 것 말고는 동생과의 긴 통화 정도 그리고 먼 산 보기.

오전에 계획된 것을 완수하고 산책이나 육십 년도 훨씬 넘긴 리마스터링 한 이탈리아 영화를 보고 올까 했는데 그것마저 귀찮아 접었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은 건 나의 칩거에도 잠든 폰이 이를 대변한다.

바쁘지 않은 삶은 늘 내가 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몸에 국한된 것이지 상상과 구상은 부지런하기를 바랐다.

지속적이던 생각의 속도가 줄어든 것이 유쾌하지 않다.

생각이 게을러지는 것을 자책한다.

생각이 멈추면 몸이 빨라지거나 늘어진다.

생각 없이 빨라진 몸도 위태롭고

생각 없이 늘어진 몸도 권태롭다.

둘 다 똑같이 존재론적으로 게으른 것으로 보인다.

바쁘다고 부지런한 것은 아니다.

나의 껍데기인 몸의 속도와 알맹이인 맘의 속도가 서로 균형을 이룰 때 부지런한 상태다.

맘의 값이 영에 수렴할수록 게으른 상태라고 본다.

시간은 이면지처럼 뒷면이 없으니 다시 쓸 수가 없다. 그러나 복기는 가능하다.

수정할 수는 없어도 재인식은 과거를 새로고침 재저장하는 효과는 있다.

오늘은 유독 여백이 많은 하루였다.

이를 한국화의 특징인 여백의 미처럼 능동적인 빈칸으로 바라보련다.

그릴 것이 없어 비워둔 것이 아닌 여백처럼!

야간 사냥이 남지 않았는가.

낮에 비축한 에너지를 불러내어 부엉이 올빼미 박쥐 따위를 잡으러 나서야겠다.

마음으로 사냥하기에 늦은 시간은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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