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규칙적인 패턴을 익히는 것이 기술이라면 시낭송은 그 반대편에 서 있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다면 낭송은 그 매력의 범주가 개인이거나 유사하게 향유하는 작은 무리를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최근 어느 신문사 문화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시낭송은 기술인가 예술인가'의 질문에 노인이 언급한 답변의 일부이다. 수많은 시를 낭송하면서 매번 다르게 표현하는 것도 기술로 접근한다면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시인이 자신의 시집에 실린 시들의 패턴을 가지지 않듯 시낭송가도 유사한 패턴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아야 관객은 신선하다고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항상 새롭게 느끼게 하는 것이 가능할까. 노인은 그러하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못한 낭송가들을 '바람둥이 낭송가'라고 불렀다. 저 여자에게 '사랑해'라고 고백한 말을 다른 여자에게 '사랑해'라고 똑같이 말하는 것과 같다고 얘기한다. 그것은 두 여자의 개별적 존재 가지를 부정하는 것이다. 청자를 고민한다는 것과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특수성을 고민해서 낭송해야 한다는 노인의 낭송 철학이다.
-낭송 무대에서 시선택의 스펙트럼을 확대해야 합니다. 특히 젊은 시인들의 시는 낭송 무대에서 좀처럼 만나기 힘든데, 이는 난해함과 운율이 없다는 것을 그 이유로 들어 선택을 기피합니다. 시가 어렵다는 것은 개인적인 관점의 차이니 차치하고라도 운율이 없다는 것이 낭송을 불가능하게 하냐는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시가 노래이고 운율이 낭송을 용이하게 하는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허나 부레가 없다고 물속에서 헤엄을 치지 못하는 건 아니죠. 심지어 상어는 부레가 없는 어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라앉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헤엄을 쳐야 하는 숙명이죠. 시낭송이 불가능한 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불가능에 도전하지 않은 낭송가들이 있을 뿐입니다.
노인의 인터뷰 기사는 갈수록 현 낭송문화에 대한 비판이 거세졌다. 어조는 높아지지만 거부감보다는 애정이 더 강하게 다가왔다. 소년은 노인의 기사를 한참을 바라보며 궁금한 점들이 공기방울처럼 떠올랐다 사라졌다. 젊은 시인들의 시는 소년도 시도하다가 포기한 적이 많았다. 낭송이 어려운 문장도 있었지만 어떻게 무대에서 전달해야 하는지 막막해서다. 그 부분을 노인에 묻고 싶던 차에 이 기사를 만나니 반갑기도 하지만 다시 호기심이 끓어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