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숲오 eSOOPo Apr 28. 2023

우아한 집착

0320

지금으로부터 약 반 세기 전에 쓴 어느 과학자의 책 머리말을 보다가 그만 숨이 멎었다.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것은 5년 전 한 가지 아름다운 체험에서 비롯되었다. 늦여름의 어느 날 오후, 나는 해변에 앉아서 파도가 일렁이는 것을 바라보며 내 숨결의 리듬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우주적 춤을 추고 있다는 것을 돌연 깨달았다. 한 사람의 물리학도로서 나는 내 주위의 모래와 바위와 물과 공기가 진동하는 분자와 원자로 되어 있으며, 그것들은 다른 입자들을 창조 또는 파괴하는 부단한 상호 작용을 계속하는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중략) 고에너지 물리학 연구를 통해서 나는 이런 모든 문제에 이미 친숙해 있었지만 바로 그 순간까지 그것을 단지 그래프나 도표, 수리론을 통해서만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해변에 앉았을 때 나의 이전 경험들이 싱싱한 생기를 띠게 되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수많은 입자들이 창조와 파괴의 율동적인 맥박을 되풀이하면서 외계로부터 쏟아져 내려오는 에너지의 폭포를 '보았던 것'이다. 나는 또한 원소들의 원자와 내 신체의 원자들이 에너지의 우주적 춤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리듬을 느꼈고, 그 소리를 '들었으며', 그리고 그 순간 그것이 바로 힌두교도들이 숭배하는 춤의 신인 '시바의 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중략) 시초에는 마음이란 게 어찌하여 자유롭게 유동하는가, 또 정신적인 직관이 어떤 작위적인 노력 없이 의식의 저 깊은 심연으로부터 어떻게 떠오르는가 하는 것을 나에게 보여 준 '정신적인 씨앗'이 내 사색의 실마리를 잡는 데 도움을 주었다. 나는 이러한 첫 경험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수년간의 정밀한 분석적인 사고 끝에 정신적 직관이 나에게 떠오르자 그 압도적인 감격에 나는 눈물을 흘렸으며 그 순간 나는 카스타네다처럼 그 인상을 종이쪽지에 황급히 적어 내려갔던 것이다. (이하 생략)

아직 책의 본문을 펼치지 않았기에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 정도로 저자가 강렬하게 경험한 깨달음이라면 그 어떤 분야의 이야기라도 꼼짝없이 머리를 처박고 몰두해서 경청하고 싶다.

그리고 잠시 후 밀려드는 두 번째 파도는, 글쓰기란 이러한 전율 후의 작업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글로 남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찌릿찌릿한 책임감. 5년 동안 저자를 사로잡은 에너지를 상상해보게 한다.

세계와 내가 결코 별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상호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각자의 상상의 범주 안에서 가장 뾰족한 부분이 열린다.

이쯤에서 저자가 말미에 언급한 문화인류학자인 카를로스 카스타네다의 '돈 후앙의 가르침'을 다시 떠올려본다.

어떠한 길도 하나의 길에 불과한 것이며,
너의 마음이 원치 않는다면 그 길을 버리는 것은
너에게나 다른 이에게 무례한 일이 아니다. (중략)
모든 길을 가까이, 세밀하게 보아라.
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몇 번이고 해 보아라.
이 길이 마음을 담았느냐? 그렇다면 그 길은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길은 소용없는 것이다.

글쓰기의 진부함이 밀려올 때쯤에 카스타네다는 엄중하게 내게 되묻는다.

그리고 나의 반응을 묵묵히 기다린다.

정령 마음을 담은 글쓰기가 아니라면 우리는 누구도 소용없는 일을 하고 있는 거라는 그의 깊은 통찰에 나는 다시 한번 겸허하게 무너지고 만다.

매거진의 이전글 마감의 느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