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8
반숙이 완성되는 시간이다.
그러나 완숙의 시간은 무한정이다. (무한정은 유혹적이지 못하다! 인간이 무한대로 산다는 걸 상상해 보라! 끔찍하지 않은가!)
오묘한 욕망은 날 것과 익은 것 사이의 중간을 추구하는 것이다.
절묘한 욕구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에 가 닿고 싶은 것이다.
늘 경계는 이토록 제한적인 욕망의 영역이다.
완성이 풍족해 보이나 미완이 매력적이기도 하다.
글쓰기도 계란을 삶는 것과 같다.
완벽한 글쓰기 이전의 미완의 글쓰기가 그러하다.
지금, 여기 이 순간의 기록이 어찌 완전할 수 있겠는가.
(완벽한 글쓰기를 위해 차일피일 미루는 것의 무의미와 어리석음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 미완은 완벽하다.
진정성을 고스란히 녹여내기에 시간이 지난 후 열어 보아도 여전히 맥박이 살아 있다.
진정성은 현재성을 보장한다.
문장이 견고하지 못하고 맞춤법이 비틀거려도 글의 척추는 곧고 튼튼해서 자잘한 주변의 불안은 이내 불식된다.
그러니 지금 당장 현재라는 잉크로 글을 써야 한다.
지금이라는 먹을 갈아 글을 한 자 한 자 써 내려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만의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구조체인 현재를 무엇으로 입증한단 말인가.
글쓰기는 완벽하지 않은 완성이 아닌 완벽한 미완을 추구한다.
그래서 글쓰기는 고독한 행위이며, 외로운 작업이다.
자꾸 나를 들쑤셔야 하고 나의 옆구리를 찔러야 하고 나의 비밀을 자백하게 해야 한다.
가장 소득이 없는 결과물들이 수북하게 쌓여가는 것을 무심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반숙의 언어들은 완숙의 언어보다 집요해서 여지를 던지고 여운을 남긴다.
7분 29초까지의 끊임없는 사투와 긴장은 느긋한 무한정보다 팽팽하다.
매일 나 자신을 지속적으로 450초 동안 끓이는 것은 가치 있다.
푹 삶지 않고 절반을 익히는 일은 글을 쓰는 것이다.
그러니 글쓰기는 더이상 사골을 우려내는 것이 아니라 계란을 반숙으로 삶아내는 것이어야 한다.
오늘 완성되지 않은 작은 결핍은 내일의 글쓰기를 추동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