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지금 시낭송이 필요하다 32회

기분도 생각이에요

by 이숲오 eSOO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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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며칠 째 소녀의 제안이 눈에 밟힌다. 에드거 앨런 포의 '애너벨 리'를 낭송 버스킹에서 해달라고 한 말을 거절하고 싶지 않다. 어찌할지 모르는 이 감정은 표현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기대일지 모른다. 처음 신청곡을 받아 쥔 디제이처럼 설레는 걸 보니 더욱 그렇다. 그 설렘의 대상은 온전히 그녀가 아니다. 누군가에게 낭송할 시를 추천받은 일도 처음이거니와 누구를 특정해 낭송하는 경험도 처음이기 때문이다. 무대에서 사랑에 관한 시를 하지 않는 것은 소년에게 불문율 같은 것이었다. 연애 시라든가 가슴 절절한 사랑이야기를 담은 시를 낭송했더라면 지금보다 더 많은 관객들 앞에서 공연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년은 고집스러우리만치 사랑 시를 배제했다. 그런 소년에게 '애너벨 리'는 가당치 않은 제안이었고 무리한 요구인 셈이다.




2년 전 소년에게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다. 소년도 어렸고 여자도 어렸던 그 시절. 그 둘의 만남은 그로부터 6개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년은 대학생이 되면 하고 싶은 버킷리스트를 이미 완성해 놓은 상태였다. 무려 백 가지에 육박하는 자잘한 희망사항들을 강판을 격파하듯 하나씩 이루는 재미가 솔솔 하던 시기였다. 그중 제법 굵직한 몇 가지를 두고 저울질하던 그해 여름, 소년은 유럽 배낭여행에 앞서 전국 자전거 일주를 하기로 결정했다. 대전에서 시작한 일정은 경기도, 강원도, 경상도 방향으로 이어지다가 제주도를 일주한 후 전라도에서 최종 충청도로 마무리되는 35일간의 강행군이었다. 소년은 여행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자전거 뒷자리에 1인용 텐트와 최소한의 짐을 싣고 떠났다. 마침 전공에 대한 회의도 한 몫했지만 지금 떠나지 않으면 영영 이런 여행은 못해볼 것 같은 절박한 마음이 더 컸다. 며칠간은 엉덩이가 배겨 잠을 못 잘 정도였지만 금세 적응이 되었다. 자전거 여행은 정직했다. 페달을 밟은 만큼 자전거는 나를 딱 그만큼만 옮겨주었다. 그래서 처음엔 내리막길이 좋았으나 이내 오르막길이 나타나 아까의 불로소득을 회수해갔다. 한참을 바닥만 보며 뙤얕볕 국도를 달리다 보면 자전거가 앞으로 가는 건지 도로가 뒤로 가주는 건지 헤갈렸다. 길 위에서 소년은 자신의 길을 무수히 되짚고 그려보았다. 지금 가려는 길이 내 길이 맞는지 아니면 잘못 들어서는 길은 아닌지. 아무리 페달을 밟아도 답은 보이지 않고 체인의 구슬만큼 질문만 소년을 칭칭 감았다. 특별할 것 없는 시간들이 지나고 제주도에 도착해 5일간의 일주 일정이 시작되고 둘째 날. 사려니숲깊 입구에 막 도착해서 쉬고 있을 때였다. 반대편에서 자전거를 탄 여자가 소년 앞에 와 멈추고는 길을 물었다.


-저, 실례지만... 가까운 자전거 수리점이 어디 있어요?

여자가 탄 MTB 자전거의 브레이크 부분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이다. 너무 막막하던 차에 소년의 자전거가 보여 반가웠다는 얘기도 했다. 소년은 자신이 오는 길에 보지 못했으나 수리점까지 잠시 동행해 주겠다는 부탁하지 않은 답변까지 덧붙였다. 여자의 경상도 내륙지역 억양이 소년의 마음을 흔들었다.

-사려니숲의 전설을 아세요?

어미를 '알아예,'나 '아능교'로 끝내지 않은 사투리는 처음 들어본 소년은 자꾸 웃음이 나와 부끄러웠다. 아까는 그토록 뜨겁던 그 길이 하나도 무덥지 않았다. 서로의 신상을 묻고 답하지도 않았는데도 소년은 가슴 한 켠을 내어주고 있었다. 소년은 조용했고 여자는 명랑했다. 자전거 수리점부터는 서로의 일정을 존중해 연락처만 주고받고 헤어졌다. 사실 존중했다기보다 소년은 설득할 용기가 없었다.


그 후 2주간의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와 소년은 여자에게 연락을 했고 그녀도 안부를 전했다.

-집이 경주라고 했지 사는 곳은 말 안 했는데요.

여자는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깔깔 웃었다. 집이랑 사는 곳이 뭐가 다를까 소년은 의아했지만 이내 알아차렸다. 여자는 서울에서 여대를 다니고 있었고 친한 친구 셋이서 재충전 위해 동반 휴학 중에 자전거 여행을 떠난 거라고 뒤늦게 알려주었다. 소년은 여자의 적극적인 모습이 부럽고 좋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났고 그때마다 소년은 구름 위를 달렸다. 아무 일없이 마냥 좋을 것 같던 관계는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작은 말다툼으로 끝이 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갈등의 원인을 소년은 여전히 모르고 있다. 그저 마지막 던전 한마디만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넌 왜 생각 없이 기분으로만 행동하니?

소년은 별생각 없이 한 말이 이별이 될 줄은 몰랐다.

사흘 후 소년이 여자에게 전화를 걸어보지만 받지 않았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후 문자가 왔다.


-제겐 기분도 생각이에요. 미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