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숲오 eSOOPo May 17. 2023

겸손의 종말

0339

바야흐로 불손의 시대다.

공손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으나 불손이 그 남은 자리마저 위협하고 있다.

버스가 나란히 가던 트럭과 신경전을 벌이다가 마침내 나란히 차를 세우고 언쟁을 벌인다.

덩치 큰 버스기사는 젊고 상대적으로 아담한 트럭기사는 연배가 높다.

다짜고짜 버스기사는 반말로 버스만 한 크기로 소리지르자 트럭기사는 이에 질세라 트럭바퀴같이 거친 욕으로 맞받아친다.

차라리 싸울 때는 사용하는 언어가 영어로 바뀌면 좋겠다. 

원인은 위협운전이었는데 점점 반말이 서로의 심기를 건드린다. 

각자의 차는 안전한데 기사들의 자존심이 전치 6주다. 

언제부터 우리는 타인에게 함부로였는가.

언어로 예의를 파괴하는 건 상호 간 영역의 담을 부수고 넘어오는 폭력적인 행위와 다름 아니다.

이런 모습은 -공손해지 않기로 서로 결기라도 한 듯이- 요즘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 되어 버렸다.


공손은 두 가지를 충족해야 하는데 예의와 겸손이다.

예의는 타자와의 사이에서 나의 태도이고 

겸손은 타자에 대한 나의 낮춤이다.

예의는 그 자체로 중립적이어서 갖추어야만 제 구실을 한다.

예의는 그야말로 마음을 먹고 꾸려야 그곳에 닿을 수 있다.

마치 짐을 싸듯이 순서를 챙기고 어긋남이 없어야 하니 번거로울 법도 하다.

그 사이에 감정은 누그러지고 차분해진다.

그러니 나쁜 감정을 사용하려면 예의 따위는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일 뿐이다.

겸손은 낮아지는 태도다.

물러서는 것은 대적하는 것과 상반된 행위가 된다.

맞서 싸우려면 겸손은 비겁한 모습으로 보이고 나약한 듯 비친다.

지는 것이 이긴다 것을 몸소 실천하기 어려운 순간을 맞는다.

사실 겸손이 어려운 것은 타자와의 두 번째 만남을 상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상대의 격해진 감정을 받아주면 상대는 다음에 평정심으로 만날 때 미안해진다.

감정은 서로가 조심스레 받아주는 배구의 리시브여야지 맞받아치는 스파이크가 되어선 안 된다. 

두 번의 기회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겸손을 어렵게 한다.

이번에 승부를 내야 한다는 절박감이 마음을 조급하게 하고 감정을 충동한다.

공손의 나비 효과!

나의 (손해 보는 듯해 보이는 현재의) 공손이 미래의 나에게 공손으로 돌아오는 법이다.

나의 (통쾌한 듯 휘두른 현재의) 불손이 언젠가 나에게 어김없이 불손으로 돌아온다.

상대의 작은 실수로 빚어진 상황에서 내가 조금 화내기 유리한 입장일 때 공손을 발휘하면 내가 정말 지는 것일까. 아니 상대가 나를 우습게 볼까. 아닐 것이다.

위선인 겸손의 과잉도 나쁘지만 마음의 빈곤에서 빚어진 겸손의 결핍은 더 나쁘다.

겸손이 없어지면 인간은 한없이 누추해진다.

공손이 없어지면 인간은 한없이 초라해진다.

불손은 관계에서 서로를 결국 빈손으로 만들고 만다. 


부디 겸손이 종말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놓아 정신 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