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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May 21. 2023

무용의 언어

0343

무용을 보러 갔다.

오월의 오후는 무더웠다.

이 글은 무용에 대해 무지한 자의 치기 어린 감상들이다.

무용과 연관된 어떠한 고급정보도 없으며 순전히 감각의 기록이다.

공연관람하기 전까지 내게 무용은 음악에 맞춰 흥겹게 추는 춤이었다.

두 시간 동안 공연을 보는 내내 무용에 대한 기존의 편견들이 부끄러워졌다.


무용은 발의 예술이다.

언뜻 보기에는 손과 팔의 움직임이 주를 이루는 듯 보이나 사실 발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무용에서의 용자는 '뛰다'는 의미를 가지며, 부수가 발 족자다.

발레리나의 상징도 토슈즈가 아닌가.

역동적인 움직임을 위해 발은 무용수의 모든 신체기관 중 가장 부지런해야 한다.

무용은 예술과 스포츠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스포츠에 더 근접해 있기에 피겨스케이팅이라는 종목도 가능했으리라.


무용은 음악보다 미술에 가깝다.

음악의 선율과 박자에 맞춰 무용은 진행되지만 무용의 행위는 회화적이다.

미술이 캔버스에 붓으로 그린다면 무용은 허공에 몸으로 그린다.

음악이 무용을 보조하기에 음악이 절대적으로 무용과 손잡는 것 같지만 아니다.

음악이 생략된 무용을 보게 되면 무용수가 그의 몸짓을 배경음악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신의 심장박동의 리듬에 따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무용에서의 집단춤은 손끝과 발끝의 정렬이 중요하지 않다.

각자의 독립된 호흡은 각각의 다양한 춤의 선을 창조한다.


인간의 모든 몸짓은 무용이 된다?

걸어가는 것도 비틀거리는 것도 뛰어가는 것도 멍하니 멈춰 서있는 것도 무용이 된다.

우리는 늘 움직이고 무용에서도 보여주는 몸짓을 하면서도 무용이라 할 수 없는 것은 왜일까?

몸짓의 질서를 부여하는 방식때문이 아닐까.

예측되는 동작으로 넘어가려는 욕망을 누르고 다른 몸짓의 제시를 하면 무용이 된다.

하나의 질서를 결정하면서 무수한 무질서를 생성하게 하는 힘을 무용은 가지고 있다.

몸에서의 질서는 관습이나 습관으로 흐트러진 육체의 진부한 몸놀림의 총합이다.

무용은 노이즈 투성이의 몸짓들 중에서 정제된 몸짓들을 추스른다.

쉬워 보이나 흉내 낼 수 없는 몸짓들이 무용수들의 육체를 빌어 무대에 펼쳐진다.

  

무용에 언어가 필요 없는 이유는 몸짓이 언어를 잠식하기 때문이다.

언어가 만드는 구조보다 견고한 이미지의 집을 언어보다 빠르게 부수고 짓는다.

그것의 반복은 언어보다 몸짓이 수다스럽지 않으며 여운을 깊이 남긴다.

무용에 입을 달아주려는 것은 날아가는 새들에게 다리를 더 달아주는 것만큼 어리석다.

무용은 스스로의 언어를 몸짓으로 적확하게 구사하고 언어보다 넓은 의미를 선사한다.

무용수마다 각자의 지문 같은 몸짓을 가지며, 보는 이에게 다른 음역의 감흥을 가능케 한다.


무용을 보러 갔다.

공연의 모든 막이 내려가자 무용의 소용을 실감하고 있었다.

이토록 강력한 무용의 여운을 이제야 만끽하다니...

그 어떤 예술보다 인터랙티브 했음을!

무용을 누가 무용無用하다 말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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