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지금 시낭송이 필요하다 27회

낭송이 질문하고 삶이 답하고

by 이숲오 eSOO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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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오는 길을 선호하지 않는 소년이다. 노인과 만난 장소에서 버스노선은 멀지 않으나 우회하기에 어쩔 수 없다. 저녁 퇴근시간과 맞물려 지하철 칸칸마다 붐볐다. 팽팽한 스프링이 장착된 동전케이스에 동전을 밀어 넣듯 소년은 지하철에 올라탔다. 낯선 이와의 밀접한 거리에서 시선을 피해 서 있으려면 휴대전화가 최적의 사물이다. 이 문명의 이기는 얼마나 많은 이들의 불편한 시선들을 구원해 줬는가. 휴대전화가 없었다면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여행 가는 어색한 행위들이 이처럼 대중화되고 만만한 도전이었을까. 시선만 잘 처리해도 생각보다 많은 용감한 일들이 가능해질 것이다. 휴대전화의 필요 없는 앱들을 지우다가 얼마 전 소녀의 문자메시지가 떠올라 유튜브 채널로 접속했다. '애너벨 리 낭송'이라고 검색했다. 수많은 영상들이 줄지어 눈앞에 펼쳐진다. 그중 가장 먼저 눈에 띈 영상을 클릭했다. 알랭 모리소드풍의 음악이 배경으로 흐르고 비음이 강한 성우의 목소리가 구슬프다. 간간히 들리는 파도소리가 점점 커져 가자 성우의 목소리도 급하게 몰아친다. 소년은 멈추고 다음 영상으로 옮겨간다. 이어 여러 낭송가들의 영상을 들어보지만 목소리만 도드라진다거나 기교만 드러나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년은 들으면 들을수록 자신이 없어졌다. 이미 낭송하는 이들만큼 목소리가 뛰어나지 못하다는 점이 먼저 주눅 들었다.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대단히 실력 있는 이들의 낭송인데도 이 정도의 감동이라면 시낭송이 줄 수 있는 감동의 크기를 소년이 감당해 그 이상으로 끌어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낭송의 한계를 실감했다. 게다가 번역투의 문장들은 듣는 내내 매운 음식을 찾게 하는 제대로 만들지 않은 파스타를 먹는 느낌이었다. 소년은 이러한 표현방식의 낭송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대안의 방식은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자신도 비슷할 것이라는 우려가 더욱 엄두를 내지 못하게 했다.

그녀는 분명 다음 거리공연에 올 것이다. 소년은 소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올려야 한다. 아니 올리지 말까. 올릴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어떻게...



소년은 집에 도착할 때까지 고민해 보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다. 노인은 답을 가지고 있을 것 같아 전화로 물으려다 만다. 노인은 답을 바로 말한 적이 없다. 늘 질문을 던지고 소년이 스스로 찾도록 시간만 허락할 뿐이다. 요즘 들어 노인을 닮아가는 듯하다. 자꾸 질문만 머릿속에 커져가고 늘어간다. 때로는 엉뚱하고 무모해 보이는 질문들이 앞다투어 소년의 입 안에서 맴돈다. 그중에서 가장 큰 질문이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 이전에는 자신의 낭송에만 집중했었다. 마음이 편했다. 비교 대상이 없었으므로. 이제는 나란히 소년 옆에 선 낭송들이 자꾸 곁눈질을 하게 하고 눈치를 보게 한다. 그럴수록 소년의 낭송이 누추하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타인의 비난은 누구보다도 잘 견뎌내는 소년이지만 자신이 자신에게 겨누자 무딘 칼인데도 상처가 크게 남는다. 낯선 고통이다. 대책 없는 공격이라서 그런가 보다. 낭송에 대한 고민들은 어느새 인생의 근본을 고민해야 고작 작은 힌트 몇 개를 얻을 수 있을 정도로 깊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