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지금 시낭송이 필요하다 26회

치유와 위안을 위한 신비로운 놀이

by 이숲오 eSOO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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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노인을 마주하자 며칠 전 꿈에서 본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한번도 무섭다고 여긴 적이 없는데

질문을 에둘러하고 있다.

-선생님은 이제껏 기억에 남는 낭송이 있으세요?

-음... 있었지. 그러니까, 한 오 년 전인가... 전라도 어느 도시에서 개최한 낭송대회 심사위원으로 간 적이 있었네.

소년은 내심 노인의 경험을 들을까 하고 물은 것이다. 이내 자신이 모호하게 물었다는 것을 알아차렸으나 아련한 노인의 눈빛을 보자 그것이 상관없어졌다.

-한 스무 명 정도가 본선을 치르고 있었는데, 그때도 아마 오늘처럼 무더운 여름이었던 걸로 기억이 나네. 마침 감기약을 먹고 심사를 보는 터라 집중도 되지 않고 몸은 나른해서 어서 끝나기만을 바랐지. 자세는 어느새 반쯤 누운 듯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을 즈음 마지막 출전자가 무대에 올라왔네. 앞의 사람과 키가 차이가 커서 스탠드 마이크를 진행요원이 조절하는데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군. 나도 모르게 몸을 고쳐 앉아 뒤를 보게 되었어. 그 사이 넓은 무대 위 한가운데 마이크와 출전자만 남게 되었지. 원래 낭송대회는 배경음악이 없기에 본인이 시작하는 시점을 스스로 정해야 하는 건 자네도 알고 있지? 한참을 조용하더니 제목과 시인의 이름을 천천히 말하는데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목소리였어. 목소리를 통해 나이를 알 수 없다는 건 감정이 아닌 감성으로 시를 표현하고 있다는 1차적 몰입을 의미하거든. 좋은 목소리는 청각이 아닌 후각을 자극한다네. 꽃의 향기는 우리를 자연스럽게 잡아당기지 않는가.


소년은 불현듯 노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흑종초라는 꽃이 떠올랐다. 씨앗이 검어 니겔라라고도 불리는 이 꽃은 잎과 줄기마저도 신비롭다. 탱자나무의 가시 같기도 하고 코스모스의 잎 같기도 한데 꽃을 주위로 보호하는 자태가 노인의 목소리와 닮았다. 살벌한 분위기의 엄호를 하면서 잎에서는 달콤한 바닐라 향이 나는 이 아이러니! 소년에게 노인의 목소리는 흑종초 그 자체였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는 시였네. 첫 연에서 조심스레 어릴 적 아버지와의 추억으로 초대하더니 시에는 언급되지 않은 반목의 순간을 행간에서 들려주는 듯했어. 그것은 미안하고 안타까운 일이었다고 용서를 청하고 있더군. 자칫 활자에 매몰되어 막연한 슬픔만을 표현할 수 있는 유혹으로부터 벗어나는데 그 의지가 낭송의 흐름을 예상할 수 없는 곳으로 날 데리고 갔어. 그러다 보니 나는 그녀의 이야기가 궁금해져 귀가 아닌 오감을 열어 감상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어. 이제부터는 그녀의 낭송이 더 이상 평가의 대상이 아닌 거지. 잠깐 내가 기존에 알고 있는 시가 이 시가 맞나 의심이 들어 주최 측에서 준비한 프린트물을 보기도 했네. 분명히 다른 참가자들과는 달랐네. 마지막 연의 두 행을 낭송할 때에는 그 처연함에 한참을 그녀가 데리고 간 이야기의 공간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지. 그리곤 깨달았네. 이렇게 용서를 청할 수도 있구나. 낭송으로 치유가 가능하구나.

노인에 눈가가 촉촉해져 있음을 소년은 놓치지 않느라 아까 쥐고 있던 질문들을 놓쳐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