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은 무척 화가 나 있다. 무대 주변은 갈기갈기 찢긴 종이들로 어지럽혀져 있다. 연단 위에 선 노인은 싸움닭처럼 몸을 흔들거리며 말을 쏟아낸다. 강렬하고 일방적인 상황은 좌중의 반응마저 제압하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감정에 도취된 낭송을 해서는 안됩니다. 아무도 그런 낭송에 관심을 갖지 않아요. 지금 당신들의 낭송이 얼마나 시를 망치고 있는지 알고 있나요? 불과 몇 분 전 무대에서 보여준 그 낭송들이 두 번 듣고 싶어 지는가를 스스로 물어보십시오. 두 번 들을 가치가 없다면 한 번 들을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출전자 모두의 목소리가 마치 한 사람인양 천편일률적인 낭송은 그만하십시오! 이번 대회의 대상 수상자는... 해당자가 없습니다. 금상 수상자도 없습니다. 은상 수상자도... 동상 수상자도...
소년은 눈을 떴다. 아직 캄캄한 새벽이었다. 미처 타이머를 맞춰두지 않은 선풍기는 등지고 돌아가고 있었다. 그 바람은 책상 위에 올려둔 종이들을 날려 바닥에 낙엽처럼 서로 포개 놓았다. 평상시에는 볼 수 없는 쩌렁쩌렁한 노인의 목소리가 지워지지 않았다. 너무 생생한 광경에 한참을 어리둥절했다. 여기가 대회장인지 방인지... 암순응으로 이내 익숙한 사물들의 실루엣을 보고서야 알아차렸다. 그리고는 소년은 안도의 작은 한숨을 내쉰다.
-아...
다시 잠을 청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뜬 눈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수요 시낭송 모임에 모처럼 전원이 모두 참석했다. 무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분위기다. 예선을 통과한 이들은 본선에 가지고 갈 시를 정하기 위해 왔다. 그렇지 못한 멤버들도 각자의 이유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시낭송대회를 준비하는 데 있어서 시를 선택하는 일이 8할쯤 되는 것 같다. 좋은 시는 좋은 낭독을 돕는다. 여기서 오해를 풀고 가야 한다. 좋은 시란 것이 훌륭한 시인이 쓴 잘 쓰인 시를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낭송하는 이와 잘 맞아야 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잘 맞는다는 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시치미의 리더는 이 부분을 강조하고 있었다. 한 사람씩 돌아가며 출전 시를 선택한 이유를 말하는 시간을 가지자고 제안했다.
-제가 선택한 시는 학창 시절 첫사랑에게 보낸 편지에 함께 적어 보낸 추억이 있어서 기억에 남아요.
-지난겨울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하면서 고른 시입니다.
-하하. 저는 특별한 이유보다는 그냥 느낌이 좋아서 선택했습니다.
소년의 차례가 올 때까지 멤버들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성실하게 답을 한다.
-저는 낭송으로 경쟁을 한다는 것이 무척 신기합니다. 그것이 우열을 가늠하는 기준이 무얼까도 추측해 보았지만 잘 모르겠어요. 우선 대회에서 어떤 시들을 가지고 하는지 찾아보고 그중에 가장 거부감 없는 시로 선택했어요. 아직 3편 중에서 최종 선택은 못한 상태고요.
소년은 이미 정해온 멤버들의 단호함과 분명함이 부러웠다. 서로 과정도 함께 하는 줄 알았는데 결과를 정해와야 하는 분위기였다. 누가 골라주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천에는 수많은 시들이 풀꽃처럼 흐드러지게 피어있었고 그중에 한송이의 시를 골라 꺾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모임은 각자의 짧은 연습으로 마무리되었고 특별한 모니터는 없었다. 연습실 문을 나서는데 리더가 뒤에서 어깨에 손을 얹으며 낮게 말했다.
-정 고르기 힘들면 그림이 분명히 그려지는 시로 하세요.
소년은 리더의 조언보다 그의 걱정하는 눈빛이 고마웠다. 그러겠다고 웅얼거리듯 말하고 돌아섰다.
도심의 매미 소리는 듣는 온도계같다. 우렁차게 온 몸으로 한여름의 깊이를 측정하고 있다. 신은 왜 계절을 인간에게 던져준 것일까. 꿈에는 없는 계절을 말이다. 어쩌면 현실을 인증하는 표식을 하기위함이 아닐런지. 태양이 기다란 원반처럼 늘어지는 오후 길을 걸으며 노인이 보고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