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이유는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지만
글 쓰는 방법은 별자릿수만큼 에 불과하다.
방법이 모든 글을 쓰게 하지는 않으나 이유가 빈약할 때에는 방법이 궁여지책일 수 있다.
그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원작자의 문장을 가져다가 리라이팅 하는 방식이다.
소재나 주제에 치중해도 되고 문체를 변화해도 되고 자신의 사례나 생각을 개진해나가도 좋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원문장 (김혜남 에세이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중에서)
- 상처는 우리가 무언가를 절실히 원하기 때문에 받는 것이다.
무언가 원하는데 그게 내 바람대로 되지 않을 때 상처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원하는 게 정말 합당한 것인지부터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2) 나의 문장 (이숲오 리라이팅)
상처는 우리의 욕망과 무관하게 무언가에 무방비일 때 받는 것이다.
대책 없음은 상처받음의 빌미가 된다.
상처는 그때마다 혼란스러워 판단을 왜곡시키기도 한다.
자신의 탓으로 끌어안는 우를 범하기도 하는데 이는 상처에 대한 그릇된 애티튜드다.
상처는 불균형의 상호작용일 경우가 많다.
이때 살필 것은 나 혹은 상대의 욕망보다는 이전의 안일했던 관계를 다시 살피는 계기로 삼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고 중요하다.
상처가 기대와 달리 깊어지기도 하는 건 내 탓으로 문제를 끌어안거나 남 탓으로 치부해 버리는 편향의 문제에 있다.
상처는 몸에 난 상처, 마음의 상처, 의도한 상처, 일방적인 상처, 상호적인 상처, 가해자가 모호한 상처, 스스로 낸 상처 등 다양하다.
상처는 어떠냐에 따라 다루는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모호하게 상처라고 던져놓고 기술해가다 보면 읽는 이는 자신에게 가장 근접한 상처를 적용해 이해하려 할 것이다.
보편적 상처라는 것이 있을까.
모든 상처는 특별하고 특수하다.
상처는 추상이다.
구체적이라고 느껴지는 건 사례를 통해 감정이입이 이루어지면서부터다.
한시적으로 상처가 실감 나 추상이 아닌 듯 체험된다.
가장 큰 범주로 다룰수록 공감대는 넓어지나 개념은 추상으로 내달린다.
보편적인 순간이 가장 모호한 순간이 된다.
개별적인 순간이 가장 분명한 순간이 된다.
글쓰기가 매번 난감한 이유는 내 상처의 민낯을 마주하기 때문이다.
환부는 타인에게 보여주는 경우보다 스스로 바라볼 때 고통이 더 크다.
어쩌지도 못하는 상처를 보이는 그대로 활자로 옮기는 것은 기도보다 숭고하다.
글쓰기는 수술이 시급한 내 마음 곳곳의 상처를 열었다가 고스란히 닫는 것의 반복이다.
잘못된 글쓰기는 이 과정에서 주술적 태도로 빠지거나 니힐리즘으로 비스듬히 허물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