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뭇거리다 그를 애써 언급해 쓰지 않았던 이유는 소설의 말미에 젠 체한다는 인상을 경계해서다.
그래도 이 상황을 운명처럼 느낀 연유는 소설을 쓰는 내내 쿤데라를 염두에 두었다는 사실이다.
그처럼 소설을 쓰고 싶었던 것은 그가 말한 대로의 방식을 내 소설에서 실천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어서다.
그러면서 그의 소설 '불멸'에서의 한 장면이 자꾸 연상되었다.
쿤데라 자신이 소설에 등장해서 자신이 집필 중인 소설에 대해 아베나리우스 교수와 음식을 앞에 두고 나누는 대화가 이러하다.
아베나리우스-지금 자네가 쓰고 있는 게 정확히 어떤 건가?
쿤데라-얘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네.
아베나리우스-유감이군.
쿤데라-왜 유감이지? 오히려 운이 좋은 거라네.(중략) 소설에서 본질적인 것은 오직 소설에 의해서만 말해질 수 있지... 그리고 자신의 소설을 보호하고 싶다면 그는 사람들이 그것을 각색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달리 말해서 그것을 이야기할 수 없는 방식으로 써야만 한다네.
아베나리우스-자네 얘길 듣다 보니, 자네 소설이 따분하지나 않을까 염려되는군.
쿤데라-대단원을 향해 뜀박질이 아닌 것은 모두 따분하다는 얘긴가? 이 맛있는 오리 궁둥이를 뜯으며 자네는 따분함을 느끼나? 목표를 향해 서두르고 있나? 정반대로 자네는 이 오리고기가 가능한 한 천천히 자네 속으로 들어가길 원하네. 그 맛이 영원히 지속되길 원한다고. 소설은 자전거 경주를 닮은 게 아니라 많은 요리가 나오는 향연을 닮아야 한다네. (중략) 새로운 인물이 나의 소설에 등장할 걸세... 그는 무엇의 동기도 아니며 어떤 효과도 낳지 않네. 나의 마음에 드는 것이 바로 그거라네... 자네 역시 이 이야기에 매료될 걸세.
내 소설의 극 중 인물의 생사를 결정하는 것이 극적임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은 건 쿤데라가 말한 대로 억지로 좁은 골목길로 채찍질하며 등장인물을 쫓으려 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것은 쿤데라의 말마따나 극적 긴장은 진짜 소설의 불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의 소설 <꿈꾸는 낭송 공작소>를 극적 긴장 없이도 소설이 흥미로울 수 있다는 걸 조금이나마 느낀다면 그건 팔 할이 쿤데라 덕분이다.
소설을 쓸 때에는 쿤데라가 그립더니 소설을 마치고 나니 설터가 보고 싶어졌다.
'롤리타'를 쓴 나보코프와 함께 쿤데라가 '불멸'을 이야기한다면 그 반대편에 제임스 설터가 버티고 서서 '소멸'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영원할 것 같이 소설을 쓰다가 언젠가는 잊히리라는 두려움이 밀려오면서 '내 소설도 사라지고 말겠지'라는 체념으로 넘어가며 설터가 떠올랐나 보다.
간결한 문장으로 묵직하게 한 걸음씩 걸어가는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소설가는 아무나가 못하는구나라는 소심한 자포자기가 왕왕 생기게 된다.
그래서 더더욱 소설을 쓰는 내내 좋아하는 설터의 글은 한 줄도 읽지 않았던 거다.
얼마나 훔치고 싶은 문장이 즐비한지.
나는 도대체 이렇게 간결하게 말할 수 있는 문장을 왜 이리 구구절절 늘어놓아 혼돈케 하는지.
별의별 자책들이 밀려오기 때문이다.
그래도 설터에게 배운 것을 써먹고 싶어 내가 만든 설터다운 문장들은 이런 것들이다.
이 맛은 시적이군요
박수가 악수 같았다
혹시 내 소설을 읽다가 간결하면서 상황과 감정을 적확하게 묘사한 부분이 있다면 이는 설터에게 빚진 것이리라.
오늘은 마침내 신간 소설인 이숲오 장편소설 <꿈꾸는 낭송 공작소>의 입고일이다.
인쇄를 힘겹게 마친 따끈한 책이 출판사 창고로 들어온다.
내일부터는 예약판매접수한 책들이 인터넷서점을 통해 발송될 것이다.
마치 여러 날동안 밤새 분홍색종이에 손으로 꾹꾹 눌러쓴 연애편지를 새벽에 봉한 후 부치러 빨간 우체통으로 걸어가는 길가에 서 있는 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