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이숲오 eSOOPo
Jul 30. 2023
지금은 어제의 오아시스에서 내일의 오아시스 사이 사막 어디쯤엔 가에 있다.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하여 돌아보지만 어제의 오아시스는 보이지 않는다.
이내 다가올 듯하여 목을 길게 뽑아 보려 하지만 내일의 오아시스는 신기루처럼 현상일 뿐 형상이 아니다.
오늘이라는 사막 한가운데에 있다.
오늘에 다다르고서야 어제가 오아시스였음을 뒤늦게 알아차린다.
기억 속에서만 오아시스는 유년의 추억처럼 남아있다.
오래된 앨범 속의 사진은 오아시스의 흔적이다.
그래서 삶은 낙타의 무거운 걸음이다.
지난날이 아름다운 건 견딜만해서가 아니라 현재를 스친 풍경들이 지옥이었다손 치더라도 과거에 안착하는 순간 오아시스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오아시스는 겪어본 무지개지만 그 빛깔을 제대로 헤아려 본 적이 없으니 난감하다.
시간이 본디 그라디에이션이기 때문이다.
1초에서 2초로 넘어가는 순간은 사하라사막보다 광활하고 우주의 별들이 서로 마주하는 거리보다 멀다.
현재가 찰나이면서 영원한 것은 더 이상 아이러니가 아니다.
서울의 도로와 보도블록에는 온돌이 깔려 있다.
칠팔월이 되면 뻐근해진 시민들의 몸뚱이를 위해 절찬리에 가동한다.
샌들의 바닥이 눌어붙을 정도로 뜨거워진 바닥의 온도는 머리끝까지 전달하려면 최대한으로 틀지 않으면 안 된다.
무료로 제공되기에 함부로 온도조절을 요구할 수 없다.
중앙난방식이기도 하거니와 모두의 취향을 소용할 수 없는 것이 서울시 측의 비공식적인 입장이다.
가을은 버스로부터 먼저 온다.
천정의 구멍에서 쏟아지는 가을바람이 선선하다.
머리에 닿을 때마다 머리카락이 단풍으로 물든다.
수확을 하기 위해 문장들을 브런치스토리에 떨구고 있다.
차가 흔들릴 때마다 문장들은 제자리를 찾고 불필요한 언어들은 정류장에 설 때마다 알아서 내린다.
사람들이 몰려가는 곳마다 여름이 자리하고 있고 사람들이 벗어나는 곳마다 다른 계절이 피어난다.
나는 지금 사막의 한가운데에 멈추어 몸을 웅크린 채 낙타의 발톱을 깎아주고 있다.
이 사막을 무사히 건너기 위해서라면 낙타에게 이 정도 호의는 베풀어야 하지 않을까.
페디큐어까지는 아니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