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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Aug 10. 2023

손꼽아보는

0424

요즘 들어 자주 손가락으로 꼽아본다.

우선순위를 정할 때에도

약속날짜를 헤아릴 때도

해야 할 일을 점검할 때도

챙겨야 할 기억들을 더듬을 때도

손가락이 있어서 유용하다.

꼽을 때마다 구부러지는 손가락이 표식이 된다.

적어도 열 가지는 체크할 수 있다.

손가락마다 메모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손가락을 하나씩 구부릴 때마다 정리가 된다.

손가락 개수 안에 들어가는 일, 사물, 항목 등은 그만큼 중요한 범주에 든다.

열 번째 이후의 것들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고, 망각해도 무방한 것이라고 여긴다.

시간이 지나 손꼽은 일들이 지나가고 기억 밖의 것들이 손가락 안으로 들어오면 그제야 내 일이 된다.

과부하가 걸리지 않도록 십진수 인간은 열 가지에서 문단속을 하기로 한다.

더 많은 일을 한다고 더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잡고 있는 것만이라도 제대로 해내자는 것이 내 지론이다.

손을 꼽는 것은 다짐이다

손가락을 접을 때의 관절의 각도만큼 똑 부러지게 일을 해 내겠다는 다짐이 담겨 있다.

다져지지 않는 마음으로는 함부로 손을 꼽지 않는다.

손을 꼽는 것은 설렘이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기다리는 날로 미리 달려가는 마음은 손가락을 꼽는 일로 달랜다.

손가락 하나씩 부드럽고 악착같이 접을 때 그리운 날은 성큼성큼 내게로 오는 듯하다.

손을 꼽는 것은 챙김이다

손가락 사이에는 미세한 필터가 끼워져 있어서 엄중한 기준으로 손가락을 꼽는다.

손가락은 압정이 되어 흩날리는 생각들과 계획들을 하나씩 잡아다가 마음에 고정시킨다.


대신 기억해 주는 보조장치들이 많아 손가락 꼽을 일이 줄어드는 요즘에는 불필요한 동작일지도 모르겠다.

가끔 누워서 천장을 보다가 그리운 것들이 떠오를 때에 손가락을 꼽아보자.

그 그리움의 대상이 꼽은 손가락 사이에 고리처럼 걸려 저 멀리 날아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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