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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Aug 18. 2023

겨를의 소멸

0432

겨를이 사라지고 있다.

삶은 하나의 일에서 하나의 일로 건너가는 것과 같다.

일은 독립된 섬이고 일들 사이에는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그 다리를 '겨를'이라고 부른다


겨를은 시간으로 다루지만 공간으로 치부置簿한다.

여유를 여백처럼 넉넉한 공간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바쁘다고 '일'이라는 섬들을 촘촘하게 붙여버리면 더 이상 섬은 섬이 아니고 일은 일이 아닌 게 된다.

그러고는 겨를이 없다고 아우성친다.

일은 언제나 일들 사이를 벌려 놓아야 일다워진다.

번거롭더라도 일에서 일로 가는 곳에 다리를 놓아야 한다.

다리를 건너면서 육체도 쉬고 마음도 쉰다.

멈춤이 없고 쉼이 없는 일의 연속성에는 긴장과 무기력만 뱀의 혀처럼 날름거린다.


겨를은 일 A가 결코 일 B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일 A를 수행할 때의 근육과 일 B를 완수할 때의 신경이 같을 수 없음은 비극적 사실이다.

이때 인간은 기계가 아니기에 부속품을 교체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교체한다.

생각의 모드 mode를 돌리면서 시간의 여유를 갖는 것이다.


겨를도 맛본 자들만이 겨를을 다룰 수 있다.

온통 '다리 없는' 섬에서의 일상을 보낸 이들은 휴가라는 '억지 겨를'을 마련해 겨를인 양 보낸다.

겨를의 본질인 '시간의 여유'가 빽빽한 일정에서 일처럼 보내지기도 한다.

섬에서 떠난 곳이 또 다른 섬이라니!

휴가를 보낸 후 더 피곤한 것은 온전한 겨를이 아닌 탓이다.

겨를은 공간이 변화가 아니라 시간의 변화에서 탄생하기 때문이다.

휴가를 겨를에 가깝게 보내려면 일정이 한없이 게으르고 느려터져야 한다.

겨를은 결코 목표지향적이지 않다.

그러니 휴가 후 피곤하지 않으려면 목적지 없는 떠남을 시도해야 한다.

겨를 끼리는 서로 만나지 않는다.

인파가 몰리는 곳에는 산소가 희박하듯 겨를도 희박해진다.


미래의 인간 중에서 가장 부러운 인간은 겨를이 풍부한 자가 될 것이다


공간을 마음대로 쓰는 것은 물질로 가능하지만

시간을 리듬대로 쓰는 것은 돈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입버릇처럼 무엇 무엇할 겨를이 없어라고 자주 말하고 있다면 나의 일들 사이에 무너진 다리들을 점검할 때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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