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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Oct 06. 2023

무언의 수다

0481

말이 없어지는 글을 쓴다.

하려는 말들이 죄다 자취를 감추고 쓰려는 글들도 뒷짐을 지고 있다.

하루종일 한 줄의 문장도 낳지 못하는 하루가 있구나.

그런 날에는 침묵해야 한다.

숨은 쉼 없이 쉬면서도 어찌 글은 이리도 왕왕 호흡이 짧고 고르지 못하는가.

차라리 마신 물의 부피를 재고 흘린 땀의 무게를 달고

잡념의 생각 한 줄기 뽑아다가 신발주머니라도 만들었어야 했다.

가을하늘 공활하다.

거대한 노트가 머리 위에 있구나.

아무것도 하지 않은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수증기마저 자음과 모음을 엮어내지 못하고 녹아내리는 질타들이 줄을 지어 달린다.

말발굽을 달고 있어서 달리는 소리는 경쾌하다.

달그락 달. 글. 악.

설거지할 때 나는 그릇 부딪는 소리를 달리는 말의 뒷모습에서 듣는다.

한 번도 마셔보지 못한 텅 빈 술잔의 독한 술을 마시고 싶다.

코에서는 불기둥이 솟아오르고 양쪽 귀에서는 기적소리가 피어오른다.

글을 쓸 때보다 글을 쓰지 않을 때의 기운이 더 좋은 것은 달갑지 않다.

글 쓴 후의 기운을 퍼다가 허술해진 이전의 상태에 퍼다 나른 일이 허사가 된다.

아무래도 잘되려고 하는 일에는 자꾸 마가 끼고 이끼가 자라고 병충해가 깃든다.

어차피 오늘은 도매금으로 매도해 버렸다.

아. 아. 아. 아에이오우

글이 써지지 않는데 목을 풀고 몸을 풀고 있다.

어딘가에 묶여 있는 목도 아니고 아이를 낳은 몸도 아닌데 하루종일 풀고 있다.

어딘가 고장이 난 건 분명하다.

코드를 꼽지 않은 컴퓨터의 운영체계를 다시 설치하는 기분이다.

그래서 어제의 술술 풀림은 저주라고 부르는 것이다.

모두가 손뼉 칠 때 가장 두려워지는 순간이다.

냉큼 이 자리를 떠나든가 양말이라도 벗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아무것도 하기 싫고 

아무것도 말하기 싫은

그런 날이라는 속엣말을 이렇게 눅눅한 빨래처럼 늘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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