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현재를 살고 있다. 아무나 지금을 사는 것은 아니다. 이미 휘발된 향수 같은 과거를 애써 맡으려 시간을 보내거나 살아있을 거라 함부로 예언하고 미래를 염려하느라 지금이 타들어가는 줄 모른다. 노인은 건강에 이상이 왔음을 불쑥불쑥 느낄 때마다 삶의 본질을 머리가 아닌 온몸으로 실감했다. 어제의 꽃향기를 지금 맡을 수 없고 내일의 구름을 오늘 그려볼 수 없는 것이다.
현재 present는 선물 present 같아서 적극적으로 받아 안고 포장지를 뜯지 않으면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도통 알 수 없다. 현재는 그저 주어지지 않는다. 신은 인간에게 현재를 쥐어주고 7초만액션을 요구한후 가차 없이 과거로 내던져 버린다. 잔인한 듯 보이나 신은 너그러워서 매 순간 반복한다. 마치 영원한 듯 보여서 빠르게 도는 자전거의 바큇살이 멈춰 보이는 착시처럼 느끼게 한다. 그러니 어리석은 이는 당연하다고 여기고 지혜로운 이는 눈치채고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
노인은 과거에 쓰여진 시를 현재의 무대에서 어떻게 표현하느냐를 줄곧 고민해왔다.시에만 집중하니 감정만 앞서 나오고 무대에 집중하니 기교가 자꾸만 도드라져 불만이었다. 균형을 맞추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감정과 기교의 중간을 살펴 상상해 보지만 막연하기만 했다. 절충이란 예술에선 의미 없는 접근이었다. 빨강 물감에 파랑 물감을 섞듯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날의 영감이 아니었다면 평생 풀리지 않을 수수께끼로 남았을 것이다.
추운 날 급히 먹은 음식으로 탈이 나 며칠간 고생한 적이 있었다. 처방받은 약은 제때 먹어야 해서 집 가까이 있는 죽 전문점을 이용했는데 이도 한 두 끼 먹다 보니 금세 입에 맞지 않았다. 집에서 직접 만들어 먹는 게 낫겠다 싶어 불린 쌀을 냄비에 넣고 팔팔 끓인 후 어느 정도 익자 중불에서 서서히 주걱으로 저었다. 지루한 시간을 면해보려 노인은 흥얼거리며 시를 암송했다. 참기름을 두르는 그 순간 노인은 번뜩이며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그래! 이거구나. 시간에 있었구나. 시도 아니고 무대도 아니야.
알 수 없는 말들만 늘어놓는데 노인은 복잡한 수학 문제를 푼 듯 확신에 차 있었다. 누군가 곁에 있었다면 그 시간이 무엇인지 물었을 것이다. 노인은 급히 불을 끄고 북극곰 엉덩이처럼 둥글게 하얀 죽을 남겨둔 채 책상으로 가 앉았다. 광고로 여백이 있는 신문지 한편에 휘갈겨 적기 시작했다. 몇 자는 적다가 쓱쓱 지워버려 알아볼 수 없었다. 그나마 알아볼 수 있는 문장만 옮겨 보자면 이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