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숲오 eSOOPo Feb 13. 2024

햇빛 자르기

0611

누워서 이마로 떨어지는 햇빛을 손가락 가위로 자른다.


아무리 잘라도 햇빛은 조각나지 않는다.


그저 손가락 사이에서 명멸하는 태양은 태연하다.


어젯밤 달빛은 그토록 유순해서 방 한가득 색종이처럼 어지럽다.


반투명한 유리병에 담아 밀봉한다.


한여름 장마철 달빛이 가뭄일 때 개봉할 것이다.


햇빛은 어떻게 장만하면 좋을까.


허공으로 손바닥을 쳐들어 한 줌 낚아채 호주머니에 급히 넣는다.


손이 작은지 주머니가 작은지 하루 수확량이 적다.


이래서는 시베리아와 알래스카 친구들에게 약속한 당근 나눔이 물거품 된다.


해는 테두리도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너그러울 줄 알았는데 잘못된 계산이다.


구름을 베고 있을 때 반쪽 태양의 허리를 찌른다.


힘이 센 것들은 섬세한 구석이 취약하다.


헤헤헤헤


고개를 들어보니 덩치 큰 해의 간드러진 웃음소리다.


햇빛을 모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오늘은 여섯 시 칠 분이면 사라진다.


집에 있는 도구들을 총동원한다.


바가지, 국자, 티스푼, 젓가락, 몽키스패너...


해의 목덜미에 걸만한 훌라후프까지 준비한다.


사실 필요한 건 해가 아니라 햇빛이다.


마치 내가 원하는 것이 그녀의 얼굴이 아니라 아름답고 눈부신 미소였던 때가 떠오른다.


소유의 본질을 생각한다.


그것보다 그것의 가능성과 그것으로부터의 발현을 탐닉하는 것에 대하여 말이다.


https://brunch.co.kr/@voice4u/178


글쓰기도
말하기도
어쩌면 햇빛 자르기 같은 것은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어떤 목마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