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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자르기

0611

by 이숲오 eSOOPo

누워서 이마로 떨어지는 햇빛을 손가락 가위로 자른다.


아무리 잘라도 햇빛은 조각나지 않는다.


그저 손가락 사이에서 명멸하는 태양은 태연하다.


어젯밤 달빛은 그토록 유순해서 방 한가득 색종이처럼 어지럽다.


반투명한 유리병에 담아 밀봉한다.


한여름 장마철 달빛이 가뭄일 때 개봉할 것이다.


햇빛은 어떻게 장만하면 좋을까.


허공으로 손바닥을 쳐들어 한 줌 낚아채 호주머니에 급히 넣는다.


손이 작은지 주머니가 작은지 하루 수확량이 적다.


이래서는 시베리아와 알래스카 친구들에게 약속한 당근 나눔이 물거품 된다.


해는 테두리도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너그러울 줄 알았는데 잘못된 계산이다.


구름을 베고 있을 때 반쪽 태양의 허리를 찌른다.


힘이 센 것들은 섬세한 구석이 취약하다.


헤헤헤헤


고개를 들어보니 덩치 큰 해의 간드러진 웃음소리다.


햇빛을 모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오늘은 여섯 시 칠 분이면 사라진다.


집에 있는 도구들을 총동원한다.


바가지, 국자, 티스푼, 젓가락, 몽키스패너...


해의 목덜미에 걸만한 훌라후프까지 준비한다.


사실 필요한 건 해가 아니라 햇빛이다.


마치 내가 원하는 것이 그녀의 얼굴이 아니라 아름답고 눈부신 미소였던 때가 떠오른다.


소유의 본질을 생각한다.


그것보다 그것의 가능성과 그것으로부터의 발현을 탐닉하는 것에 대하여 말이다.


https://brunch.co.kr/@voice4u/178


글쓰기도
말하기도
어쩌면 햇빛 자르기 같은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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