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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Oct 29. 2024

제자리 탐닉

0870

상실의 아픔에 고통스러운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정신을 잃을 때까지 술을 마시며 괴로움을 잊으려 하지만 그것도 일시적이라 효과가 미미했습니다


샤워기의 물을 세차게 틀어놓고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에 머리를 파묻고 큰소리로 울부짖습니다


한참 지나자 내면의 목소리인지 신의 목소리인지


너의 본디 자리로 돌아가라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립니다 나의 제자리는 어딘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눈물인지 샤워기의 물인지 모를 온통 젖은 온몸을 추스르고 작은 방에 들어가 커튼을 젖히자 가을햇살이 불쑥 짜릿해 손을 들어 손바닥으로 햇빛을 밀며 한쪽 눈을 찡긋 합니다


헝클어진 표정과 머리를 손으로 쓸어내리며 의자를 바짝 당겨 가만히 앉습니다 한참을 고요히 고요히



음소거되었던 주변의 하찮은 소리들이 일어납니다


작은 새소리 공기청정기의 미세한 엔진소리 숨소리

심장소리   이 마음이 저 마음으로 옮겨가는 소리도


전쟁 같던 마음이 갑작스레 휴전한 듯 평온해집니다

 

어쩌면 제자리는 공간이 아닌 마음의 상태일지 모릅니다 제자리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발전인 줄 알고 까마득한 곳까지 가고서야 소중함을  압니다


하루 중 제자리를 돌아보는 시간을 헤아려 봅니다


하고 있는 것들이 제자리를 돌보는 것인지 제자리를 잊게 하는 것인지 다시 살핍니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늦어지는 것도 퇴보하는 것도 아닌 참나의 길을 제대로 솎아내는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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