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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Nov 07. 2024

옷이 뭐예요

0879

나는 단벌신사다 아니 단벌거지다


옷을 잘 사지 않는다 아니 살 줄 모른다


검소해서가 아니라 옷에 관심이 없다


무관심은 옷에 대한 감수성이 취약한 탓이다


내 몸의 장점도 약점도 모르니 옷으로 어디를 돋보이게 할지 어디를 가려야 할지를 모른다


그저 편안함에 주안점을 두고 복장에 소홀하다 보니 경조사가 있으면 참으로 난감하다


옷장에 격식에 맞게 예를 갖출 마땅한 옷이 없다


추리닝을 아무리 다려도 추리닝은 추리닝이다

티셔츠를 아무리 다려도 재킷이 되지 않는다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동네에서 벗어나 가장 옷가게가 많은 쇼핑몰을 찾는다


평소에 입지 않는 옷가지들을 마네킹들이 폼나게 입고 유혹한다 슬쩍 소매 사이의 가격표를 훔쳐본다 사무실 월세 보름치다 내가 입어도 될까


옷감을 만져본다 싶으면 어디선가 점원이 나타나 세상 고운 미소로 당신에게 딱 어울린다고 부추긴다 무조건 들어와 둘러보라고 한다 이런 환대가 없다 점원은 간과 쓸개가 여럿 있는 것 같다


그의 눈을 보면 아니 입을 수가 없다 잠겨지지 않는 지퍼를 겨우 잠그며 힘겨워하자 이내 다른 사이즈의 옷들을 기다렸다는 듯이 대령한다 이런 시중이 없다 다리를 들면 옷이라도 입혀줄 태세다


그의 움직임을 보면 다른 매장으로 매정하게 갈 수가 없다 이렇게 정성을 다하는데 이쯤 되면 그에게 실망을 주기 어려워진다 그는 연신 나를 칭찬하고 나이보다 한참 젊게 보인다는 립서비스가 밉지 않다 계획에도 없던 옷가지를 하나 더 고른다


점원은 옷의 장점을 늘어놓으며 왜 내가 이것을 입어야 하는가를 구차하지 않게 열거한다 거울을 보며 들으니 쉽게 설득된다 모르는 분야는 장악한 자가 칼자루를 쥔다 이 옷을 디자인한 사람이 날 위해 만들었나 착각이 들게 한다 그리고 다시 가격을 보니 그렇다면 지불할 명분이 단단해지고 장벽이 낮아 보인다 착시도 이런 착시가 없다


내가 졌다


첫 집에서 샀으니 비교대상도 없고 더 나은 옷도 만나지 못한다


자주 옷을 사지 않으니 이렇게 어리숙한 쇼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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