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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맑게 잊기로 의지해 보는

챌린지 15호

by 이숲오 eSOOPo

이별


고 정 희



새벽 다섯시면

수유리 옹달샘 표주박 속에

드맑게 드맑게 넘치고 있는 사람

드맑게 넘치다가

아침 나그네 목 축여주고

머나먼 마을로 떠나고 있는 사람

머나먼 마을로 떠나다가

인천 만석동이나 온양에 이르러

한많은 사람들 발을 적시기도 하고

어린 물풀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없이 거대한 들판을 가로질러

까마득한 포구로 떠나고 있는 사람


떠날 수 없는 것들 뒤에 두고

바람처럼 깃발처럼 떠나고 있는 사람

아흐, 떠나면서 떠나면서

사라지지 않는 사람




오랜 시간 잠을 잤다


깊은 잠 선잠 잠 그리고 잠 잠 아닌 잠 눈뜨고 자는 잠 꿈 없는 잠


누군가 위에서 내리누르는 기운을 느끼며 잠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긴 시간에도 허리는 아프지 않고 머리가 어지럽다가 배로 통증이 옮겨가다가 발끝에서 사라졌다


아무도 깨우지 않아도 눈이 떠지다가 아무도 재우지 않아도 눈이 감겼다


맑아지다가 우울해지다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지다가 다시 의욕이 기어 나왔다


그 사이에 무수한 꿈의 조각들이 지나갔는데 기억나는 장면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잠은 잊어보는 시간이고 잊기로 의지하는 시간이다


덕분에 긴 잠에서 많은 것을 잊을 수 있다


잠을 못자면 못잊어 피곤하고 잠을 푹 자면 잊느라 피곤하다


이러나 저러나 피곤한 인생


잠이 없었다면 얼마나 지루할까


오랜 시간 잠을 잤다


씻은듯이 잊혀진 것들이 무수한 별이 되어 쏟아지는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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