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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이현 Apr 04. 2020

<우럭 한 점 우주의 맛> 박상영, 젊은작가상 2019

「2019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문학동네)」中 대상작


벌써 일 년 전에 샀던 ‘2019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서점에 가면 가끔 각 출판사에서 그해 수상한 작품집에 눈길이 가는 경우가 있다. 베스트셀러나 이미 ‘기성’ 작가라는 타이틀이 붙은 여러 작품도 많지만, 이제 막 등단해 주목을 받는 신인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지는 때이다. 짤막한 프로필들을 보니, 대부분 80년대생이 많았다. 비슷한 세대의 작가가 동시대를 살면서 쓴 글은 오랜 고전에서는 맛보지 못할 현장감을 선사한다.      


책의 첫 작품은 단연 대상작부터 시작했다. 88년생 박상영 작가의 <우럭 한 점 우주의 맛>.


이야기는 주인공인 ‘내’가 우연히 ‘그’의 편지를 받는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주인공이 오 년 전 그에게 주었던 일기도 되돌아와 우편함에 꽂혀 있었다. 일기는 빨간 글씨로 무수히 많은 교정이 표기되어 있었다. 주인공은 그를 오 년 전 자신의 엄마에게 소개하려 했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주인공이 말하는 ‘그’가 ‘남자’이며, 주인공 역시 ‘남자’인 것을 알아차린 것은 회상 장면이 시작되고 나서야였다.      


주인공이 그와의 첫 만남을 그린 회상 장면이었는데, 적잖이 당황했다. 내가 퀴어 문학을 읽어본 적이 있던가. 영화는 더러 있었지만, 책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올해의 젊은 작가상 대상작으로 문단이 동성애 소재를 대상작으로 꼽았다는 점도 신선했다. 사실 많이 놀랐다. 더 읽을 것인가, 여기서 멈출 것인가에 대한 물음표가 잠시 떠올랐다 사라졌다. 이십여 페이지까지 읽었던 그의 이야기는 가벼운 농담들과 우럭 한 점의 쫄깃함처럼 읽는 맛이 있었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이렇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는 아버지와는 이혼했으며 아들은 동성애자이다. 암 판정을 받고, 억대 보험금이 나올 것을 기뻐하며 ‘할렐루야’를 외치는 중도우파 성향의 여성이기도 하다. 그녀는 아들인 주인공을 정신병원에 집어넣었지만 아들은 교정되지 않았다. 대신 상담 과정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하는 쪽은 ‘엄마’라는 진단을 받게 된다. 주인공은 사회생활도 하고, 연애도 한다. 연인인 ‘그’를 어머니에게 소개하려 했지만 암이 재발해 더욱 노쇠해져가는 어머니 앞에서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더불어 어느 시점에서는 그와의 사랑도 실패했다. 주인공의 연인이었던 ‘그’는 대학 때 학생회장 출신으로 ‘미제의 악습’을 극도로 기피하는 ‘운동’하던 형이다.      


“한동안은 사람들이 사랑이라는 말을 하는 게 싫었다. 특히 동성애에 대해서 얘기하는 사람들은 그게 누구건 무슨 내용이건 이유 없이 패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다 똑같은 사랑이다. 아름다운 사랑이다,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뿐이다……”            


100페이지 정도가 되는 이야기를 줄거리만 요약해보면, 감정 없는 인간이 읊어주는 뉴스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야기의 안으로 들어가 인물들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하고, 그 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그 세계가 나의 세계와 포개어지고 함께 흘러가는 물줄기가 된다.      


나는 모든 사랑의 실패는 ‘어머니’와의 관계에 어느 정도의 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자신을 낳은 태초의 관계가 자신을 부정한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에게 ‘괜찮다’고 할 수 있기까지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인생 자체가 먼 여정이 된다. 불행과 번민, 자기혐오로 점철된. 그리고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그런 숙제를 안고 간다고 생각한다.       


“단 한 번이라도 내게 사과를 해줬으면 좋겠어. 그때 내 마음을 짓밟은 것에 대해서. 나를 이런 형태로 낳아놓고, 이런 방식으로 길러놓고, 그런 나를 밀어내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에, 무지의 세계에 놔두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서, 제발 사과를 해줬으면 좋겠어. 그게 엄마의 본심이 아니었다는 것도, 누군가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나는 엄마를, 당신을, -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아.”


기독교적 가족 형태에 편입되지 않는 동성애라는 질병 혹은 징후는 어머니가 자신의 아들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시간이 지나, 주인공은 어머니에게 사과를 요구한다. 태초에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했던 것부터, 마치 어린 아이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벗어나 세상에 내던져진 것을 원망하듯이.    

  

이성애 외의 사랑에 대해, 그것은 비정상적이라고 (적어도 공식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신앙적 죄의식을 어느 정도 안은 채, 그러한 사랑에 대해서도 존중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자식의 이야기라면 어떨까. 저 밖은 존재하지 않는 어딘가의 너머, 또는 절벽이라 생각했던 경계에 자식이 뚜벅뚜벅 걸어가는 모습을 매일 보아야 하는 심정은.      

“네가 두 발쯤 걷다 자꾸만 멈춰 서기에 뭐하나 봤더니, 거리에 있는 모든 가게 앞에 서서 일일이 들여다보고 관찰하고, 때로는 만져도 보고 그러고 있더라.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그 모습을 뒤에서 보는데 화가 나는 게 아니라, 덜컥 무섭더구나. 네가 더이상 내가 아는 아이가 아니라는 생각에. 네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네가 걷고 싶은 길을 너의 속도로 걷는 게, 너만의 세계를 가진 아이라는 게 그렇게 섭섭하고 무서웠다. … 그래서 너를 많이 괴롭혔던 것 같네. 간이 작아서, 너를 간장 종지처럼 좁은 내 품안에 가둬놓고 싶었나보다.”  


여느 때처럼 병원 앞을 함께 산책하던 엄마는 어린 시절, 아들의 자유로운 뒷모습을 보며 ‘무서웠었다고’ 고백한다. 미안하다는 단어는 없었지만, 주인공은 이 순간 어느정도 구원받지 않았을까. 서로가 서로에게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듣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더 서로에 대한 기대를 단념하고 포기해야 할까. 듣기 원했던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기적이고 행운이다. 그리고 그토록 갈망하던 말을 아무도 해주지 않는다면, 스스로라도 자신에게 해주어야 한다.       


“나는 벌써 서른한 살이고, 성인이 된 지도 십 년이 넘었고, 그녀가 내 삶을 지연시키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누구보다도 성실히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한 명의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 정도로 성장했다. 그녀는 그저 그녀 자신으로서 존재하고 있을 뿐 나를 옥죌 의도가 없고, 나 역시 그저 나로 존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똑같은 인간에 불과하다.”      


적어도 여기에 존재하는 주인공은 그 말을 자신에게 해주고 있다.      


전 연인에게 되돌려받은 빨간 교정지를 들고 습관처럼 장애인 화장실로 들어간 그는 교정지를 하나하나 낱낱이 찢어버리고 나온다. 그리고 다시 고요하고도 평온한 일상으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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