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야 하는 것들
마흔 즈음, 인생의 중반을 지나고 있다면...
인생의 중반을 지나고 있다면, 남은 시간의 테두리 안에서 무엇이 핵심이고 무엇이 껍데기인지를 알아야 한다. ‘삶의 지혜는 중요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데 있다’고 했다. 본질적 소수에 집중하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내 인생의 본질적 소수는 무엇일까.
우선 지극히 평범한 목록으로 ‘가족의 안녕’을 꼽을 것이다. 남편과 아이, 그리고 가족들의 무탈함. 그들과 보내는 평온이 깃든 시간. 서로를 염려하고, 장난치고, 함께 먹고 자는 순간들. 그것은 너무도 보편적인 삶의 행복이다.
그것이 충족되었다면, 나는 날개를 펼 준비를 한다. ‘지금, 여기’에 있어도 ‘여기가 아닌 어딘가’를 꿈꿀 수 있다. 그런 공상과 정서에 동력을 주는 시간이 내 인생의 핵심이다. 그것은 글쓰기와 책을 읽는 시간, 음악을 듣는 시간, 그림을 보는 시간을 통해 완성되어간다. 그리고 그 세계는 아이들이 어린이집을 가거나, 밤잠을 자는 시간에 조용히 문을 열어준다.
올해 상반기, 프리랜서인 나는 일하지 않았다. 코로나19로 아이를 맡길 곳이 없었으므로 애써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커리어의 정점으로 향해 가는 남편의 그늘 아래서, 아이 엄마로서 주로 시간을 보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벅찼다. 나를 위한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아이의 엄마로 살아간다는 것은 귀한 일이지만, 한평생 엄마라는 존재만을 꿈꾸며 자라온 것도 아니다. 조급한 마음으로 연년생 아이 둘이 세 살도 되기 전에 다시 일터로 복귀했었다. 그러나 막상 일터의 세계에 들어가면 복귀했다는 안도감 뒤로, 나의 시간이 일정량의 돈으로 환치되고 값싸게 소진되어감을 느낀다. 어느 정신분석 전문의의 말처럼, 일하는 동안 나는 ‘의미 부재의 외로움’을 느낀다. ‘무기력은 새로운 삶의 단계로 이동하라는 신호’라는 말을 곱씹으며, 다음 삶의 단계는 무엇일지 생각해본다. 코로나19를 계기로 하던 일을 멈춤으로써, 나의 핵심에 닿아있는 업은 무엇인지 계속 자문하게 된다.
남편은 자아실현을 위한 성취를 이루며 동시에 생계를 위한 무거운 짐을 짊어졌고, 그의 시간 중 상당 부분은 나와 아이들을 위한 것이다. 그런 남편에게 나는 심정적으로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나의 본질적 소수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남편. 그런 그가 언젠가는 생계와 업을 책임지는 시간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시간을 갖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때엔 내가 열심히 그를 응원할 생각이다.
전 세계적 불행 앞에서, 나의 일은 이렇게 자의와 타의가 묘하게 섞인 채 멈추었고 그것은 어떤 전환점이 되었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의 주인공처럼, 새 출발이 필요할 때마다 갔다는 무진으로 잠시 떠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무진의 명물은 ‘안개’다. 나의 핵심도 아직 그 형태를 뚜렷하게 나타내지 않았다. 그것은 조심스럽게 머뭇거리는 손길에 의해 빚어지는 중인지도 모른다. 안개 속에 갇혀 그 앞에 다다랐을 때만 윤곽이 확연해질 수도 있다. 어쨌든 형태는 빚어질 것이고, 나의 <무진기행>은 어떤 종착점에 이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여행의 끝에서,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일까.
버리는 일에는 소질이 없는 편이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버려야 하는 것들을 꺼내다가도 그것들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내기 일쑤다. 그리고 아직은 버릴 때가 아닌 것 같아 다시 제자리에 놓는다. 도무지 진척되질 않는다. 아마도 이런 우유부단함과 일종의 나태를 버려야 할 것 같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인생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그런데 이도 저도 아닌 인생은 지극히 보편적이고, 그래서 그마저도 지극히 사랑한다는 게 문제다.
무엇보다 시간이 유한하다는 자각이 나를 붙든다.
오마에 겐이치는 인간을 바꾸는 세 가지 방법으로 첫째, ‘공간’을 바꿀 것, 둘째, ‘새로운 사람’을 만날 것, 셋째, ‘시간’을 달리 쓰는 것을 들었다. 바꾼다는 것은 이전의 나를 버린다는 것과 같다.
나는 최근 오랫동안 살던 동네를 떠나, 새로운 곳으로 이사 왔다. 그리고 글쓰기 모임과 독서 모임을 통해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의 유대에서 큰 위안과 자극을 얻는다. 끝으로 ‘시간’을 달리 쓰기 위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러니 이렇게 핵심과 알맹이에 다가가는 행위와 연습에 시간을 들인다면, 버려야 할 것들이 자연스럽게 나를 떠나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인사를 전하지 못한 채, 그들을 떠나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이미 빈자리가 되어서야 자각할지도 모르겠다. 남겨졌거나 혹은 떠나올 수밖에 없었지만, 내 <빈집>에 갇힌 모든 것들에 ‘고마웠다고’ 인사를 건네고 싶다.
‘..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빈집>, 기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