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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이현 Mar 06. 2020

82년생 김지영의 코로나 일상

                              

 82년생 김지영의 코로나 일상




달력을 보니, 아이들이 어린이집을 가지 않고 나와 함께 집콕 생활을 한 지 오늘로 13일 째다. 심신이 지쳐간다. 5살과 6살 두 아이와 24시간을 함께 하며, 내 개인 시간은 아이들이 잠든 11시 이후에나 찾아온다.

(그 후에도 작은 아이는 종종 잠에서 깨어 구태여 나를 소환한다. 곁에 아빠는 무용지물인 것인지.)


밤의 고요한 자유 시간에는 지친 심신을 조용히 풀어놓기에도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간다. 꼼꼼히 보지 못했던 세상사와 누군가의 이야기를 정독하다가 ‘내일은 뭘 하고 아이들과 보내지’란 생각에 다시 몸을 뉘게 된다. 나만 빼고, 모두들 자신의 삶을 충만하게 사는 것 같다.


파워 블로거 엄마의 페이지에서는 ‘아이와 집에서 놀기’라는 제목으로 하루에도 여러 가지 놀이 소재 거리가 풍부하게 펼쳐진다. 부동산을 공부하고 경제적 자유를 꿈꾸는 누군가의 블로그에선 오늘도 자신이 읽은 부동산 서적의 서평과 다짐들이 적혀있다. 맥시멀 리스트가 되라며 꼬드기는 세상에서, 자신만의 소신을 지키며 미니멀리스트의 삶을 이어가는 아름다운 글도 읽게 된다. 매일매일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며 누군가는 한 편의 시를, 또 누군가는 한 편의 감사일기를 쓴다.


나의 어제와 또 그 어제, 또 어제는 어떠했을까.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정유미


하루 온종일 아이와 함께하는 엄마에게는 ‘시간 결정권’이 없다.


아이들이 더 어렸을 때인 2년 전 일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갖춰 입고 살뜰히 자기를 챙기던 여자는 사라지고, 대충 먹고 대충 입고 항상 피곤하고 오로지 아이만 바라보는 엄마만이 남는다.’라고.


한 유명한 교수가 TV에 나와 행복의 조건으로 2가지를 든 것을 본 적이 있다. ‘자기 시간에 대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과 ‘존중받는 느낌’. 내 경험에 비추어 보자면, 어린 아기를 돌보는 엄마는 이 두 가지를 철저하게 박탈당한다.


아이가 태어난 후 반년 간, 남편이 출근하는 8시가 되면 나는 남편과 여러 감정이 녹아든 눈빛으로 인사를 나눴다. 나는 ‘제발 이른 퇴근으로 나를 좀 살려달라’는 공포 어린 눈빛으로 아이를 안고 남편에게 “잘 갔다 와”라고 했으며, 남편은 ‘빨리 오고 싶지만, 쉽지 않을 테니 잘 버텨보라’는 메시지가 담긴 눈으로 “응, 빨리 올게”라고 화답하며 떠났다. 그 이후로는 이유도 알 수 없이 몇 시간을 계속 우는 아이를 안고 혼자만의 사투가 계속된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보고 나는 함께 울었던 축이다. 책 보다 영화가 더 좋았다. 정유미가 허공을 응시하듯 자신에게 닥친 변화를 마주하는 모습은 나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많은 젊은 엄마들이 정유미처럼 ‘아이가 태어난 후의 삶’의 변화에 당혹스러워한다. 만약 변화가 크지 않았다면, 그것은 훌륭한 조력자를 곁에 여럿 두었거나 그러한 조력을 둘 자본이 많은 소수 케이스뿐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훌륭한 조력자의 자리로 우선권을 둔 ‘남편’이 이름을 올리지 못한 상황을 두고, 남녀 사이에서 다소 논점이 흐려진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남자와 여자가 싸워야 하는 것이 아니다. 남편과 아내, 둘 모두는 ‘아이를 낳은 이후에도 행복할 권리가 있는 사람’이다. 싸워야 할 것은 둘 모두가 더 행복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지 않은 사회 시스템과 제도 전반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 시스템과 제도는 우리가 필요하다고 믿는 바를 실현해온 현재의 결과치다.



행복 추구권은 자아실현을 기반으로 한다. 이러한 행복추구권이 박탈되는 쪽이 언제나 정해져 있다면 그것은 사회 제도와 시스템이 우리의 의식 수준을 아직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아이의 양육은 누구의 통장에 자동이체되듯이 정해져 흘러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아이를 키우는 기쁨과 고통을 곁에서 ‘시간’을 두고 바라보는 일, 그것이 ‘양육’이라 생각한다. 21세기가 된 지금에도, 그것은 여전히 한쪽에 편중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는 일터에서 더 힘들고, 여자는 일터지만 일터라 불리지 않는 집에서 힘들다.


그런데 요즘, 그때가 다시 생각난다. 다만 강도와 버전은 달라졌다. 그때는 차마 입밖에도 낼 수 없었던 ‘살려달라’는 말을 이제는 일상의 투정처럼 남편에게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귀가가 늦는 남편은 일터에서 자신의 상황이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전했다. 맞벌이인 부부는 어린이집과 유치원 공식 휴원으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는 것이다. 따로 맡길 곳이 전무한 맞벌이 부부는 눈치가 보이지만 기관에 긴급 돌봄을 신청할 수밖에 없다. 부부가 번갈아 가며 야근을 하고 한 명이 아이를 어린이집에서 데려온다는 것이다. 그 마음을 차마 다 이해한다고 할 수가 없다.


82년생 김지영의 현실판 낮과 밤 (C.지이현)

다행인지 불행인지, 남편은 그들보다는 상황이 나으니 남아서 더 많은 일을 처리하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홀로 육아를 하는 나의 시간도 늘어난다. 아이들도 심심하고 때론 힘들 것이다. 결국은 모두가 힘들다.


‘코로나 19’라는 사태는 이렇게 나의 삶에도 영향을 미쳤다. 다시 독박 육아의 시간으로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러한 나의 일상의 변화가 부끄러울 정도로 깊은 고통 속에 있다는 것도 안다. 누군가는 목숨을 담보로 병실에 들어가며, 누군가는 주말도 없이 이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쪽잠을 잔다는 것도 안다. 불면의 밤으로 내일의 생계를 걱정해야 한다는 것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고백하는 것은 내게 주어진 텃밭을 가꿔나가는 일 말고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나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내게 지금 주어진 최선이기 때문이다. 나의 최선이 그들에게 너무 염치없는 것이라는 생각에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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