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니 Jan 27. 2019

돈과 존엄의 사이에서

작년 6월부터 진행해오던 모 정부기관의 청사 프로젝트를 협의 해지하기로 결정했다. 기관은 사실상 성립이 불가한 예산을 책정했고, 예상했듯 원하는 규모의 건물을 짓는 것은 불가했다. 계획단계에서 문제를 제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내역서가 나오기 전까지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결국 실시설계 수준의 도서를 작성하여 정확한 내역을 뽑았다. 그리고 결과는 예산의 30% 이상을 초과했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담당자들은 어떻게 하면 자기의 잘못을 감출 수 있을까만을 궁리했다. 그리고는 기존 설계의 50%에 가까운 변경을 요구했다. 당연히 건축, 구조, 기계, 전기, 소방, 토목, 조경 등 전 분야의 추가적인 용역과 그에 따른 추가적인 용역비가 발생하게 되었고, 이에 대한 대가를 요청했다. 기관의 답변은 일방적 불가 선언. 실질적 내용을 파악하려고조차 하지 않는 채 무조건적으로 자신들의 요구를 수행하라는 땡깡이 시작되었다.


담당자는 추석 연휴 전날 오후에 일방적인 설계변경 공문을 내었고, 기간의 연장에 대한 요청에는 답조차 하지 않은 탓에 연휴를 고스란히 반납하고 설계를 변경해 협력사에 배포하고, 전체 스케줄을 다시 공지했다. 그러데 이건 또 뭥미? 연휴기간 동안 푹 쉬고 온 이들은 갑자기 증액 신청을 한다며, 변경을 하지 말고 신청을 위한 자료를 만들어 내라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결과는 내년에나 나오니 무조건 기다리라나 뭐라나. 협력사들에게 졸지에 대역 죄인이 되었다.


이 정도에 이르니 더 이상 함께 가지 않는 것이 낫겠다 판단되었다. 폭풍우가 몰아칠 때 선원은 죽건 말건 자기 구명조끼만 챙기다, 폭풍이 잠깐 잠잠해지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노 저으라는 선장을 어떻게 믿고 가겠는가! 공정률 80%로 진행된 일을 최대한 양보해 50%에서 끊어 정리하자고 했다. 그러니 그제야 난리가 났다. '을'의 반란을 상상조차 못 한 것이다. 막상 설계사가 이렇게 해지를 요구하니 자신들이 감사를 받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에 안달이 났다. 그러니 그때부터 죽네사네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고, 협박과 회유가 교차했다. 결국 증액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주기로 했다.


연말에 예상보다 일찍 증액 신청 결과가 나왔다고 연락이 왔다. 협의를 하자고 해놓고 자신들의 스케줄에 맞춰 또 무한 대기를 시킨 끝에 회의는 연초에나 이루어졌다. 신청액의 일부만 증액되어 여전히 면적의 일부를 줄여야 했지만, 그래도 15% 정도의 변경으로 파악되었다. 공사비의 증가에 따라 설계비도 일부 증액되어 처음의 변경 요청 때보다는 나은 조건이었다.


그러나 담당자들의 치졸함의 끝을 경험하고는 선뜻 용역을 이어가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깨어진 그릇은 잘 붙지 않기에 다른 설계 사무실을 먼저 검토하시라 권했다. 이미 여러 설계사들을 섭외해 두었다 스스로 큰소리쳤음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나중에 감사를 받을까 두려워 그제야 꼬리를 내렸다. 다시 해달라는 청을 두 번 받고 재고를 하기로 했다. 심정적으로는 중단을 하는 것이 편하나 기관이 진퇴양난의 상황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만약 이 모든 지리멸렬한 과정들을 거치지 않았다면 우리가 마무리를 짓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다만 엉터리 과업지시서는 고치고 가자 했다.


일주일이 지나도 답이 없어 확인을 하였더니, 그렇게 매달리던 담당자 뜬금없이 '소장님, 고생하지 않게 다른 업체를 구했습니다'라고 한다. '아니, 이렇게 황당할 데가!’ ‘그래, 이 정도 수준의 사람들이라면 더 이상 재고의 가치도 없다’ 싶어 그러자 했다.


자, 결국에 남은 것은 정산의 문제. 80% 진행된 설계 용역은 백번 양보하여 50%로 정리를 하고, 현황측량과 지반조사 등의 100% 완료된 기초조사용역은 100%로 정리하자 했다. 이 기초조사용역은 원래 발주처가 별도의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것인데, 발주처의 사정을 감안해 추가로 비용을 받지 않고 전체 용역에 포함시키기로 했었다. 기관의 답은 막무가내의 불가. 얼마만큼 일을 했고, 이 항목들이 처음부터 별도로 금액을 책정해야 한다는 법상의 문구도 무용지물이었다. 선의가 진흙탕에 나뒹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 나는 인간의 바닥을 보았다.



결과적으로 지급받은 금액은 모두 외주비로 나가게 되었고, 설계사의 3개월 풀타임 업무와 4개월의 지원 업무에 대한 비용은 0이 되었다. 2,000만 원 상당의 손해가 난 것이다. 이 모든 내용을 증빙했음에도 불구하고 기관은 '그건 니 사정이고'의 태도를 취했다. 그리고는 '정 억울하면 네가 끝내던가' 한다.


나는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이 저열한 사람들과 일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수천만 원에 달하는 손실을 감수할 것인가. 최고 결정권자인 위원장과의 면담에서 그 수장 역시 같은 족속임을 확인하고, 나는 최종적으로 마음을 접었다.



돈을 잃는 것이 존엄을 잃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세상은 여러 방식으로 우리의 존엄을 위협한다. 돈 보다 존엄을 지키고 싶지만, 돈 없이 존엄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그 딜레마 사이에서 나는 일단 존엄을 택했다. 언제까지 이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지켜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아직까지는 옳지 않은 것을 뿌리치고 믿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갖고 싶다.



당신들, 부끄러운지 아시오!



2019.01.27 서울



매거진의 이전글 잠 못 드는 세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