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살리던 구호의 맛
사람이 참 신기한 게 관심이 전혀 없으면 그게 있는지도 모를 때가 많은데, 무언가에 한 번 관심이 생긴 뒤로는 무의식 중으로 관련된 정보가 자연스레 인식돼서 그런지 이전보다 해당 정보를 훨씬 자주 접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작년부터 왠지 모르게 유난히 감과 엮이는 일이 많다. 감 자체는 과일 사라다에 자주 사용하는 과일이다 보니 내가 굳이 찾지 않아도 이따금 어머니가 사다 놓으셔서 자연스레 먹어왔는데, 홍시나 곶감은 정말 요 몇 년 사이에 본 기억이 없었다. 하지만, 작년부터 유난히 감이 자주 눈에 밟히더니 늦가을쯤 홍시를 거쳐 기어코 올겨울 곶감을 마주하게 되었다. 전통 한과를 선물할 일이 생겨 곶감을 찾게 된 것인데, 사실 처음에는 다른 한과를 생각하다가 이래저래 준비할 것이 많아 이미 대부분의 재료가 준비되어 있던 ‘곶감 단지’를 떠올리게 된 것이었다. ‘곶감 단지’는 조선 시대 생활 백서인 ‘증보산림경제’ 중 ‘잡과 다식법’에 실린 ‘방험병’이란 전통 과자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서 만들어진 한과로써, 사실상 전통 한과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한국스러운 느낌이 담겨 있었다. ‘방험병’은 밤, 대추, 호두 살 같은 잡과를 찧어 꿀을 섞어 굳힌 뒤 햇볕에 말려 흉년을 대비하며 저장했던 전통 식품인데, 곶감 단지에는 꿀 대신 상큼한 유자청을 섞고 호두 대신 호두 정과를 다져 넣어 좀 더 감칠맛 나는 달콤함과 상큼한 맛을 살렸다고 한다.
곶감 단지는 호두 정과 만들기부터 시작한다. 호두 정과는 설탕이나 꿀, 물엿 등으로 시럽을 만들어 호두를 조려내서 만드는데, 시럽을 입힌 뒤에 기름에 튀겨내기도 하지만 이번엔 굳이 느끼한 맛을 더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생략했다. 호두 정과를 식히는 동안 씨를 뺀 대추를 얇게 채 썰고 곶감을 손질하면 된다. 곶감은 반건시를 선택했다. 바짝 마른 곶감을 쓰는 게 훨씬 편하긴 했지만, 곶감을 반 정도만 말려서 속살이 촉촉하고 부드러운 반건시가 더 취향에 맞을 거라 생각했다. 물론, 반건시는 곶감과 달리 속살을 모두 긁어내야 해서 생각보다 훨씬 번거로웠다. 속살이 촉촉한 채로 냉동되었다 녹았기 때문에 껍질이 찢어지지 않게 주의해야 하는데, 처음엔 나도 익숙하지 않아 결국 몇 번인가 힘들게 속살을 파내던 반건시 껍질 사이로 반짝이는 숟가락을 마주해야 했다
사실 내가 낸 아이디어긴 했지만, 대추가 워낙 많이 들어가기도 하고 재료의 조합이 상상이 잘 안 돼서 맛에 대한 확신은 없었는데, 속 재료를 만들면서 맛을 보니 각 재료가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면서 풍미를 끌어올려 생각보다 훨씬 균형감이 좋았고, 굳이 곶감에 넣어 먹어보지 않아도 이건 성공할 수밖에 없는 맛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마들렌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마들렌 속에 곶감 단지를 넣을 순 없겠지만, 곶감 단지의 원형인 방험병처럼 곶감을 직접 속 재료에 다져서 섞어주면 굳이 곶감 안에 속 재료를 채워 넣지 않아도 그 자체로 곶감 단지의 맛을 느낄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오늘은 곶감 단지 마들렌을 만들어 보았다.
속 재료는 이미 완성형에 가까웠기에 반건시만 따로 잘게 다져 섞어주었고, 반죽에는 계피를 살짝 더하기로 했다. 계피는 곶감과 수정과를 함께 먹는 것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는데, 계피 때문에 속 재료의 완벽한 균형이 무너질까 걱정했지만, 완성된 마들렌에선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서로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오히려 곶감 단지에 실수로 계피를 빼먹은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호두 정과의 진한 단맛과 고소함 속에서 대추의 은은한 단맛이 감돌았고, 대추의 쿰쿰한 향이 살짝 올라오려 하면 유자청이 앞으로 달려 나와 상큼한 단맛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 주변을 계피 향이 은은하게 감싸 안으며 원래 함께 했던 재료인 양 모든 게 균형감 있게 어우러졌다.
다양한 재료를 이용해서 마들렌을 만드는 일은 때론 괴롭고 고단하지만, 대체로 그 끝에는 이번처럼 즐거움이 남는다. 새로운 재료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과 새로운 맛을 맛보면서 느끼는 감정들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즐거움이다. 비록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움직임에 한계가 있고 더 다양한 도전을 하지 못해서 아쉬움이 크지만, 그래도 역시 매번 새로운 마들렌을 만드는 일은 지치고 힘든 삶에 큰 힘이 되어주는 것 같다. 다소 달콤한 마들렌을 조금씩 베어 물면서 앞으로도 가능한 한 꾸준히 새로운 마들렌을 만들고 기록하자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