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불을 이겨낸 생명력
지난 한 주는 참 잔인한 시간이었다. 작은 산불에서 시작된 화마가 인근 지역을 뒤덮었고, 결국 여의도 166배에 달하는 면적이 산불의 피해를 보았다. 수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 속에서 지근거리에 살고 있는 내 마음도 함께 타들어 갔다. 인간은 거대한 자연재해 앞에서 언제나처럼 무력했고, 매일같이 맑은 날씨가 야속하기만 했다. 다행히 며칠 전 비가 내렸다. 재난 지역에는 10분 내외의 아주 짧은 비가 내렸다고 하는데, 산불 진화에는 아주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오늘도 전국에선 크고 작은 산불이 이어지고 있는데, 큰비가 내려 안타까운 재난의 상처를 조금이나마 씻어주면 좋겠다.
어제는 마트에 갔다가 마트 한구석에서 우연히 고로쇠 물을 보았다. 공교롭게도 산불 피해를 크게 입은 지역에서 생산된 고로쇠 수액이었다. 수많은 나무가 타올랐는데, 그래도 아직 무사한 나무들이 남아있는 걸까. 이미 잿더미가 되어버린 수많은 나무가 다시 자라나려면 또 한참의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운이 나빴다면 화마에 휩쓸려 긴 시간 만나지 못했을 녀석을 만나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기특하기도 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덕분에 고로쇠 물에 별다른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사실 태어나서 고로쇠 물을 직접 본 적도 없었지만, 왠지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 얼른 고로쇠 물을 한병 들어 집으로 데려왔다.
아마 대다수의 사람은 고로쇠 물이 정확히 무엇인지 잘 모를 것이다. 나 역시 고로쇠 물의 정확한 정체를 알게 된 건 1년이 채 되지 않는다. 사실 1년 전까지만 해도 내 안에서 고로쇠 물이란 목초액처럼 뭔가 나무와 관련된 부산물 정도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고로쇠 물이란 대체 무엇일까?
고로쇠 물은 고로쇠나무에서 채취한 수액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고로쇠나무가 단풍나무의 일종이란 것이다. 단풍나무는 영어로 ‘maple’. 즉, 고로쇠 물의 정체는 바로 ‘묽은 메이플 시럽’이다. 나는 작년 여름, 한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서 판매 중인 유명 식당에서 고로쇠 물을 이용한 디저트를 판매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고로쇠 물의 정체를 알게 되었는데, 그 식당에서는 고로쇠 물을 1/40로 졸여 사용한다고 했다. 사실 만드는 과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그냥 고로쇠 물을 수 시간 동안 팔팔 끓여서 수분을 날려주면 된다. 냄비 한가득 담겨 있던 고로쇠 물이 점차 모두 사라지고 냄비 바닥에 붙어 보글보글 끓고 있는 모습을 보면 이게 맞나 싶기도 한데, 완성된 고로쇠 시럽을 찍어 먹어보면 은근한 메이플 시럽의 향과 함께 진한 달고나의 달달한 맛과 은은하게 화한 나무 수액의 풍미를 느낄 수 있다. 1.5L의 고로쇠 물을 1/40로 졸이면 약 37.5ml의 고로쇠 시럽을 얻을 수 있는데, 고로쇠 물 한병의 가격과 시럽을 만들기 위해 들어가는 품을 생각하면 그냥 시판 메이플 시럽을 이용하는 편이 훨씬 현명하겠지만, 한 번쯤 실제로 고로쇠 물을 졸여서 만든 고로쇠 시럽으로 디저트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렇게 오늘은 고로쇠 호두 마들렌을 만들어 보았다.
사실 원래는 반죽에 고로쇠 시럽을 섞고 겉에도 고로쇠 글라쎄를 바른 고로쇠 마들렌을 만들 생각이었는데, 그대로는 식감이 너무 밋밋할 것 같아서 고로쇠 시럽을 입힌 호두를 함께 다져 올려주기로 했다. 적당량의 고로쇠 시럽에 한 번 볶은 호두를 넣고 약불에서 함께 졸여내면 고로쇠 시럽이 점점 더 진득해지면서 호두의 겉면을 코팅하게 되는데, 타지 않도록 잘 저어주면서 짙은 갈색빛이 날 때쯤 꺼내서 식히면 손에도 묻지 않고 아주 바삭한 식감이 살아난다.
호두를 졸이고 남은 아주 진득한 고로쇠 시럽에 슈가 파우더와 물을 넣고 농도를 맞춰 마들렌에 발라 주었더니 마들렌 껍질에서 적당히 윤기가 돌았다. 거기에 산처럼 쌓아 올린 다진 호두가 더 해지니 제법 매력적인 외형의 마들렌이 완성되었다. 메이플 시럽과는 조금 다른 미묘하게 상쾌한 달콤함. 마들렌 전체에서 진동하듯 퍼져 나가는 상쾌하고 달달한 풍미와 고소하면서도 바삭한 식감이 살아있는 호두를 함께 먹으니 더없이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조금 죄송하게도 다시 고로쇠 물로 시럽을 만들 엄두는 나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은은하게 달콤한 풍미가 너무 좋아서 다음엔 메이플 시럽을 한 통 사볼까 하는 마음도 들었다.
어쨌든 고로쇠 물과 함께한 나의 응원이 미약하나마 산불 피해를 본 주민들에게 닿았으면 좋겠다. 부디 모든 사람이 하루빨리 일상을 되찾을 수 있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