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소의 끝에서 과일을 외치다
며칠 전엔 오랜만에 얼굴이 부풀었다. 종종 있는 일이라 사실 새삼스러운 것도 없었지만, 작년에 얼굴이 잔뜩 부어올라 난리를 겪은 이후로는 아무래도 불뚝 부푼 얼굴을 바라보는 마음이 그다지 달갑지는 않았다. 얼굴이 부푸는 건 절대 좋은 신호가 아니다. 몸이 제대로 순환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게다가 평소와 달리 저녁이 늦도록 부기가 가라앉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엔 거의 가라앉은 것 같았는데, 종일 한쪽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듯 불편한 감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다행히 다음 날 아침엔 눈두덩이가 완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여전히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미 여름도 시작한 터라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적당히 잘 챙겨 먹고, 최대한 잘 쉬고, 편안한 마음으로 무사히 여름을 버텨내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불안한 마음을 애써 지워내고 아침부터 마트로 향했다. 아직 집에 수박 반 통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제철 과일을 챙겨 먹으면 좀 괜찮을까 싶어 괜히 과일 코너 옆을 서성거렸다. 근데, 평소엔 관심이 없어서 몰랐는데, 지금 보니 수박 옆에 놓여있는 멜론의 종류가 생각보다 엄청나게 다양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멜론의 대명사인 머스크멜론은 한쪽 구석에 겨우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노란 양구 멜론부터 새하얀 백자 멜론 그리고 노을 멜론까지 생전 처음 보는 각양각색의 멜론들이 당당히 중앙을 차지하고 있었다. 문득 오랜만에 멜론이나 사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너무나 생경한 외모와 독특한 이름 때문에 선뜻 손이 가질 않았다. 결국 다음을 기약하며 그냥 지나쳤는데, 은근슬쩍 휴대폰으로 멜론을 찾아보니 마침 멜론의 효능에 ‘부기 제거’란 말이 적혀 있었다.
‘부기 제거’
그야말로 지금 나에게 꼭 필요한 제철 과일이 아닌가. 발걸음을 돌려 멜론 매대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빠르게 신상 멜론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리고 작은 노을 멜론 한 덩이를 손에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 설레는 마음으로 차가워진 멜론을 꺼냈다. 과감하게 칼을 넣어 멜론을 반으로 가르니, 선명한 주황빛 속살이 모습을 드러냈다. 달큰한 냄새가 은은하게 퍼지는 걸 보니 운 좋게 말짱한 녀석을 잘 골라 온 듯했다. 먹기 좋게 자른 멜론을 한 조각 입에 넣자, 달콤한 맛과 향긋한 풍미를 지닌 시원 상큼한 과즙이 입안 가득 퍼져나갔다. 눈이 동그래져서 어머니를 쳐다보니 어머니 역시 깜짝 놀라신 듯했다. 원래 멜론이 이렇게 맛있었나? 멜론 특유의 오이 같은 향이나 맹맹한 느낌은 전혀 없었고, 아주 부드러운 과육 사이에서 너무나 선명한 풍미의 과즙이 시원스레 뻗어 나왔다.
더없이 인상적인 맛과 향. 아름다운 빛깔의 속살. 멜론은 워낙 물이 많아서 마들렌에 굳이 사용할 생각은 없었는데, 막상 맛을 보니 이건 어떻게 해서라도 마들렌을 만들어야 할 것 같았다. 이름이 노을이니 좀 더 붉은색의 무언가와 함께 섞어서 노을처럼 불타는 필링을 만든다면, 더없이 완벽한 여름 마들렌이 되지 않을까? 멜론과 적당한 조화를 이루면서 붉은색 과육을 가진 과일. 뭐가 있을까.
수박.
그래, 수박이었다.
붉은 수박과 주황빛 노을 멜론으로 필링을 만들면, 그것만큼 완벽한 노을 마들렌은 없으리라. 그래서 오늘은 수박과 멜론으로 속을 가득 채운 멜론 수박 마들렌을 만들어 보았다.
멜론과 수박은 과육에서 터져 나오는 시원하고 청량감 있는 풍부한 과즙이 가장 큰 특징이다. 하지만, 디저트에선 이 풍부한 과즙이 오히려 독이 된다. 과육에서 물이 쉽게 배어 나오는 데다 원하는 농도를 맞추기가 힘들고, 다른 맛에 가려 쉽게 존재감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양한 활용 방법을 고민했는데, 의외로 전자레인지에서 수분을 날려 농축한 퓌레가 묘하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특유의 싱그럽고 시원한 느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마치 채소의 끝에서 과일을 외치고 있는 듯한 생경한 풍미가 느껴졌다. 하지만 뭔가 다시 쳐다보게 되는 오묘한 맛. 수박은 아주 진하게 농축된 토마토를 떠올리게 했고, 멜론은 멜론 향이 은은하게 남은 달콤한 호박 같은 맛이 났다. 진한 단맛을 자랑하며 여전히 자신들은 과일이라 주장하지만, 역시나 채소가 아닐까 게슴츠레 쳐다보게 되는 색다른 반전의 맛. 여름이라고 꼭 상큼하고 시원한 맛을 고집할 이유가 있을까. 이런 맛이라면 이제부터 둘 다 애매하게 남을 걱정 없이 마음 놓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여름이 가기 전, 먹고 남은 수박과 멜론이 있다면 그들의 새로운 면모와 꼭 한번 만나보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