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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럼코트 마들렌

마음처럼 흘러가지 않는 삶

by 거울새

장마가 끝났다.


이른 장마가 시작되고 며칠간 하늘이 뚫린 듯 비가 쏟아졌는데, 그게 이번 장마의 마지막 비였다. 폭우 걱정은 어느새 폭염 걱정이 되어 있었다. 초여름 더위의 목줄을 쥐고 있는 장마가 허무하게 끝나고 나니, 여름의 뜨거운 열기는 마치 핸들이 고장 난 8톤 트럭처럼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적어도 보름 정도의 시간을 깔끔하게 지워낸 듯, 7월 말 정도에나 느낄법한 강렬한 더위가 맹위를 떨쳤다.


결국 며칠 전부터는 거의 10년 만에 반바지를 꺼내 입고, 밤에 방문도 살짝 열어 놓고 자기 시작했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아침에 일어나니 찬바람을 맞고 잔 듯 목이 칼칼했다. 도대체 여름을 어떻게 버티라는 건지, 답답한 마음에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직은 못 버틸 정도의 더위는 아니었지만, 한낮엔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했다. 오븐을 킬 수도, 그렇다고 에어컨을 킬 엄두도 나지 않았다. 이런 날씨를 두 달은 더 견뎌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부터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애써 마음을 다잡고 준비한 마들렌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호기심에 구매한 플럼코트의 맛이 너무나 실망스러웠기 때문이다. 플럼코트는 자두와 살구를 교배한 품종이다. 며칠간 후숙했을 땐 분명 향기가 제법 좋아서 기대가 컸는데, 선명한 붉은 과육이 무색하게 살구에 물을 탄 듯 너무나 싱겁고 밍숭맹숭한 맛이 나서, 이게 뭔가 싶었다. 껍질을 벗기니 신맛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고 과육은 필요 이상으로 물렀다. 사실 플럼코트는 구매할 때부터 맛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한껏 지친 몸을 겨우 움직여 미리 마들렌 반죽을 만들어뒀는데, 낭패였다. 분명, 원래 이런 과일이 아닐 텐데. 머릿속이 하얘졌다.


사실 이번 마들렌의 컨셉은 갈레트였다. 바닐라와 연유를 섞어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연상시키는 달콤한 풍미의 마들렌 속에 오븐에서 구워낸 얇은 플럼코트를 잔뜩 채워 기하학적인 무늬를 연출하려 했다. 새콤달콤하면서 향긋한 플럼코트를 품에 안은 바닐라의 풍미를 느끼고 싶었다. 물에 탄 듯한 밍밍하고 무른 플럼코트는 계획에 없었다. 마들렌 반죽은 오븐이 달아오를 때만 기다리고 있는데, 정작 잔뜩 달아오른 건 오븐이 아니라 내 마음이었다. 짧은 장마부터 무더위에도 에어컨 하나 마음대로 못 틀게 하는 내 몸뚱이, 황당한 맛의 과일과 생각 없이 만들어 버린 마들렌 반죽까지. 모든 게 내 안에서 새까맣게 뒤엉켜 갔다. 정신없이 내 안을 할퀴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이대로 멈추면 이번 여름 내내 마들렌을 만들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산처럼 쌓여있었지만, 아직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있었다. 마들렌은 아직 만들 수 있었다. 만약 실패하면 다시 하면 된다. 그렇기에 마들렌 만들기를 시작했던 게 아니었나.


밍밍한 플럼코트를 얇게 잘라 설탕과 레몬즙을 넣어 재워뒀다. 전체적인 맛은 부족했지만, 분명 향기가 없는 건 아니었다. 후숙할 때 느껴진 향긋한 향을 믿기로 했다. 갈레트를 굽듯 반죽 없이 플럼코트를 구워내니 형태만 간신히 남은 플럼코트가 잔뜩 농축되어 한결 맛이 진해졌다. 생각보다 새콤한 맛이 강했으나, 선명한 맛은 되레 반가웠다. 기하학적인 무늬를 연출하진 못하겠지만, 구워낸 플럼코트를 잼처럼 바르면 계획했던 마들렌과 비슷한 풍미를 완성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렇게 오늘은 플럼코트 마들렌을 만들었다.



생각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모습의 마들렌을 완성했지만, 대신 새로운 멋을 느낄 수 있었다. 여전히 단맛이 좀 부족하게 느껴졌지만, 새콤한 풍미가 기분 좋게 입맛을 자극했고, 우아하게 뒤따르는 바닐라의 은은한 향기가 플럼코트에 매력을 더했다. 언제나처럼 마음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실패한 건 아니었다.


풀리지 않는 일에 성질을 내는 건 너무나 쉽지만, 그 화가 상황을 해결해 주진 않는다. 그저 잔뜩 구겨진 기분이 얼굴에 진한 주름을 새기고, 마음에 찜찜한 상처를 남길 뿐이었다. 그러니 그냥 그 순간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하는 수밖에 없다. 만약 그 결과가 실패라 해도, 다시 한번 도전하면 될 일이다. 의미 없는 결과는 없다. 결국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오롯이 나의 몫이니까.


이번 여름은 분명 쉽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을 조금씩 하다 보면 어느새 여름도 지나가 있지 않을까. 언제나처럼 삶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데도 실패한 여름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주저앉지 말고, 조금씩 나아가자.


그렇게 오늘도 마들렌을 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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