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팥빙수 마들렌

뜨거운 여름의 한줄기 빛

by 거울새

몇 주간 극렬하게 끓어오르던 더위가 조금씩 가시는가 싶더니, 갑작스레 비가 오기 시작했다. 창밖에서는 비가 내리는 게 아니라 강이 굽이치는 듯한 소리가 났다. 이따금 하늘이 번쩍이고 뒤이어 낮은 소리로 그르렁 대는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뜨겁게 달궈진 대지가 서늘하게 식어갔다.


비가 내리고 부쩍 시원해진 날씨에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낮이 되면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잔인할 정도로 내리쬐던 강렬한 햇볕과 짧은 장마에 메마른 초여름을 오롯이 견뎌내느라 이미 몸이 한계에 달한 듯했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완벽한 무기력함. 거대한 자연 앞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너무나 작고 미미했다.

몸 여기저기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몇 년 새 건강이 조금씩 회복되면서 전체적으로 떨어졌던 몸의 기능도 조금이나마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는데, 그게 되레 독이 됐다. 사람 몸은 은근히 기계와 비슷해서 건강이 일정 수준 이하로 나빠지면 여러 가지 기능들이 하나둘 작동을 멈춘다. 예를 들어 정상적인 상태에서 모기에게 물리면, 모기의 독이 피부에 침투하면서 염증 반응이 일어나 피부가 붉게 부풀어 오르고, 가려움증이 생기는데, 건강이 급격히 악화한 이후 몇 년간은 모기에게 물려도 피부가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아주 작게 붉은 자국이 남은 걸 보고 뒤늦게 모기에게 물린 걸 알거나, 아예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머리카락이나 손, 발톱이 전혀 자라지 않을 때도 있었다. 아무리 더워도 땀이 거의 나지 않았고, 숨만 겨우 쉬고 있는 메마른 고목처럼 온몸에 기름기가 하나도 없었다. 근데 건강이 회복되다 보니, 어린 시절부터 지겹게도 겪어왔던 땀띠를 비롯한 각종 불편함이 다시 찾아왔다. 남들처럼 몸 여기저기에 땀이 흘렀고, 평소보다 훨씬 더 빨리 지쳤다. 그 와중에 입맛은 점점 더 사라져 갔다. 잔뜩 진이 빠진 상태로 밥상 앞에 앉으면, 입에 뭔가를 넣는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식사가 내게 주어진 숙제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위안이 되어주는 음식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팥빙수였다. 워낙 밥을 먹는 게 힘든 데다 어머니도 무더운 여름에 지치시다 보니 요 근래엔 점심을 최대한 간소하게 먹고 있었는데, 가장 더웠던 주간에는 한 주 내내 점심으로 팥빙수를 먹었다. 팥빙수는 얼린 우유와 팥 그리고 연유만 있으면 간단하게 준비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시원했다. 게다가 자주 먹어도 크게 탈이 나지 않았다. 보통 여름에 차가운 음식을 너무 자주 먹으면 몸에 이상 반응이 생기기 쉬운데, 팥은 따뜻한 성질을 지닌 데다 소화를 돕기 때문에 차가운 빙수와 더없이 좋은 궁합을 갖고 있었다. 그 때문에 옛날에는 빙수를 꼭 팥과 함께 먹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과학적 근거는 알 수 없으나 매일 점심마다 시원하게 한 그릇 비워내도 큰 문제가 없으니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한 주간 원 없이 팥빙수를 퍼먹다 보니 자연스레 팥빙수를 주제로 한 마들렌을 만들고 싶어졌다. 사실 올해는 팥을 이용해서 따로 만들고 싶은 마들렌이 있어서 다른 팥 마들렌은 아예 생각한 적도 없었는데, 이렇게 고마운 팥빙수에 대한 기억을 도저히 마들렌으로 남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오늘은 팥빙수 마들렌을 만들어 보았다.


요즘 팥빙수는 워낙 다양한 재료를 가득 넣어 화려하게 만들기 때문에 어떤 팥빙수 마들렌을 만들어야 할지 많은 고민이 있었는데, 어차피 너무 복잡한 마들렌을 준비할 여력은 없을 것 같아서 연유와 팥 그리고 누룽지를 이용한 아주 고전적인 팥빙수 마들렌을 계획했다. 원래는 콩고물이나 미숫가루를 사용하고 싶었는데, 집에 당연히 있다고 생각했던 미숫가루를 결국 찾지 못해서 급하게 누룽지를 콩가루처럼 노릇하게 볶은 뒤 아주 곱게 갈아서 마들렌 위에 뿌려주었다. 마들렌 반죽엔 팥앙금과 팥가루를 섞어 팥의 풍미를 더했고 꿀 대신 연유를 사용해서 팥빙수의 풍미를 살렸다.



표면에 뿌려진 누룽지는 콩가루와는 또 다른 구수한 풍미를 풍기며 바삭한 식감으로 나를 맞이했다. 은은하게 퍼져나가는 팥 향과 코끝을 은근히 감도는 연유 향 덕분에 영락없이 팥빙수가 떠올랐다. 오랜만에 마주한 마들렌. 팥빙수 마들렌의 잔잔한 달콤함 속에 마치 밀린 숙제를 해치운 듯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이번 주부터는 비가 그치고 다시 폭염이 찾아온다고 하니 또 쉽지 않은 시간이 이어지겠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휴식을 맞이한 만큼 다시 힘내서 나아가야겠다. 모두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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